자신들의 노골적인 정치적 의견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미사라는 성사를 통해' 표명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걸 왜 미사를 통해 표명하냔 말이다. 


가톨릭에 그레고리오 미사라는 관습이 있다. 전설 같은 것인데, (연옥에 들어간) 특정 사람의 영혼을 위해 30일간 연속으로 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되고 또한 영향력 있는 관습이지만 가톨릭에서 비추천된다. 미사는 특정 한 사람을 위해 전세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공동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30일간 특정 누군가를 위한 위령미사를 드림은 미사의 공동체성을 깨트린다는 이유다. 


시국 미사도 이와 같다. 그와 같은 노골적인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장으로 미사를 사용한다면 이는 미사란 성사, 종교의례의 본래의 의미가 깨지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이 그러했듯이 교회가 사회에 있어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해야 한다면 시국 미사는 충분히 공동체적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당시 엘살바도르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정의의 길>은 매우 선명했지만 또한 피로 물들었다. 무엇이 옳은지 크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느냐 잡지 않느냐 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을 뿐.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는 다르다. 더이상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 치하도 아니고, 무엇이 가장 올바르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정책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데에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한, 복잡하고 고도화된 사회지. 시국 미사 같은 것이 허용될 수 있던 시기는 실상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때에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그토록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중히 여긴다면서 어떻게 북한 주체사상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지? 주체사상이 <사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긴 한 물건이던가? 그리고 NLL 훈련이 정말로 잘못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그렇다고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지? 


하느님과 신앙이 연평도에서 죽은 주민들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고 하던가?

      역사/사회단상  |  2013. 11. 23. 22:48




성 금요일은 한국 천주교에서 부활절 전 금요일,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이 날은 미사를 거행하지 않고 대신 '주님 수난 예식'이라는 것을 한다. 이것은 미사가 아니다.  겁나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 독서 

보편지향기도(신자들의 공동 기도) 

보관 중인 성체 영하기(먹기)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성경을 읽는 부분에서는 세 부분을 읽는데, 마지막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부분을 읽되, 여러 사람이 역할을 분담한다.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맡고, 그 외에 서술을 담당하는 사람, 군중이나 빌라도의 말 등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이 뒤에 공동 기도를 들어간다. 


원래 로마 미사에서는 거의 1500년간 내가 '신자들의 공동 기도'라고 표현한 부분이 없었다. 초기에는 있었으나 6세기경쯤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동방전례에서도 사라졌다. 이 시기 공동기도 방식은 주교나 사제가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면, 신자들이 정해진 화답문구(가령 키레에 엘레이손 등)를 외치는 형식이었다. 특히 기도주제로는 예비신자들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전례개혁 때 보편지향기도를 되살리면서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주도하는 기도로 촛점을 바꾸었다. 

(추정컨데, 이 보편지향기도가 사라진 이유는 예비신자가 줄어들었고, 성찬감사기도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포함되면서 입지가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로마 미사에서 초기 공동 기도 양식을 보존하고 있던 부분이 바로 성 금요일에 하는 '주님 수난 예식' 부분이었다. 여기서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사제가 먼저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면 여전히 신자들이 화답하는 방식으로 7-8가지 주제를 청원했다. 기도 주제는 가톨릭 교회, 교황, 성직자와 수도자, 국가, 이단 소멸(___) 등이고, 거기에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도 있었다. 


이때 기도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사제가' XXX 주제로 기도합시다' 하고 서두를 떼면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일어선다. 그 뒤에 사제가 하느님, ~~~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면, 신자들이 "아멘"하고 화답한다. 


그런데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무릎을 꿇는 부분이 없이 바로 사제가 기도를 했다. 미사경본에 있는 주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예수님을 무릎 꿇게 하고 핍박했으니 여기서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기도문에서도 "하느님꼐서는 유태인들에게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건 유태인들에게 그만큼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우셔서 역시 허락하신다...하는 의미가 전재됐다. 당연히 유태인들을 낮추어보는 의미가 전제된 것이다.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 다음에는 비신자(Paganus)를 위한 기도가 있는데. 여기서는 무릎을 꿇는 부분이 있다. 유태인들은 여기서 비신자들보다도 더 낮게 잡힌 것이다.  

그래서 복자 요한 23세께서는 1962년에 트리덴티노 미사 전례서를 고치시면서 이 부분을 수정하였다. 즉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무릎을 꿇게 하고, 기도문에서도 "유태인들에게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하는 구절을 없앴다. 


그리고 1970년 전례개혁에서는 아예 성 금요일 전례 중 보편지향기도에서 무릎을 꿇는 부분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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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사/교회사  |  2013. 9. 29. 16:01




영길리 공직자가 몇 년 전에 핀란드 음식이 참 맛이 없다고 깠다는데....  내 기억 속의 핀란드 음식은 별로 나쁘지 않다. 

내가 처음으로 핀란드 땅을 밟은 것은 2008년 12월 21일이다.  12월 18일에 인천 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며칠 현지인 집에서 숙박하다가 핀란드로 갔다.  (독일에서 날 재워주셨던 분 성함이 '라인하르트'...  나중에 은영전에서 보니까 '건방진 애송이'라며 익숙한 이름이 나오더만.)  

여행일지를 날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핀란드에 도착한 날이 동짓날이기 때문이다. 그 뒤 약 3주일간 핀란드를 여행하고 1주일 정도 스위스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때 루프트한자 비생사가 특별 할인기간이라 비행기 삯을 줄일 수 있었다. 

처음 핀란드 반타 공항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투르쿠로 갔다.  투르쿠에서 날 재워줄 사람과 약속장소인 버스 대합실에서 기다리노라니 날 처음 재워주기로 한 사람과 만나 집에 들어갔다.  솔직히 그 사람 집은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참 거시기했는데,  가자마자 쓰러져 잤다.  일어나서 귀리죽인지 뭔지를 해주었다.  

그때 내 에스페란토 실력이 영 거시기했기 때문에 대화할 때 통밥으로 이해한 게 많다.   아마 귀리죽이 맞을 거다. 나중에 먹은 귀리죽이랑 맛이 똑같았으니까.  그때 놀랐던 게  


죽 위에 숟가락을 꽂으니까 숟가락이 섰다 (_____)  


처음 봤을 땐 진짜 어이가 없었다.  이게 죽이야 떡이야 하는 느낌.  죽이 하도 되어서 그릇 한쪽을 파 먹으면 연못처럼 파이는데 잘 메워지지도 않았다.  그럼 거기에 우유를 붓고 먹었다.  이게 핀란드인들 관습인지 날 재워준 사람의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인상적이었다.  

성탄절 전날 이 사람을 따라 부모님 댁에 찾아갔다.  내가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핀란드인들에게 메일을 보냈을 떄 성탄절 기간 중에는 친척들이 찾아와서 안 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사람만 날 받아들여주었다. 자기도 부모님 댁에 찾아갈 생각이니까 우리 남매(여동생도 같다)를 거기 데리고 갈 생각이었던 거다.  

투르쿠 외곽 지역에 있는 숲이 많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어머니가 마중을 나오셨다.  동네 루터파 예배당에서 같이 예배를 보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같이 성탄절 음식을 먹었다.  나는 몰랐는데 핀란드 관습이 손님이 오면 일단 손님부터 먹게 한다고 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해 놓고 자기가 먹을 만큼 퍼가도록 했다. 나랑 내 동생이 맨 처음 퍼갔는데 (위에 어른들 계신데 우리 남매가 제일 먼저 퍼가니까 뭔가 떨떠름했다.)   된장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까만 게 있었다.   설마 진짜 된장일 리는 없겠지 해서 퍼 봤더니 소고기를 잘게 갈아서 구운 거였다.  

이 된장(___)이랑 돼지 다리를 구운 게 너무 인상 깊어서 다른 음식을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른 유럽과 비슷하게 대패(?)로 다리통만 한 치즈를 대패질(?)해서 얇은 치즈조각을 빵 위에 얹고 토마토를 거기 위에 올려 먹었던 것도 기억난다.   동양에서 왔다고 아침에 중국 여행 중에 사오셨다는 중국 차를 주셨던 거도 기억나네.  


그 뒤에 여름절 휴양지로 유명하다는 쿠오피오에 갔는데, 여기서는 현지인 집에 머무르지 않고 유스호스텔에 있었다. 돈을 아끼려고 애쓰다 보니 음식을 별로 안 사먹었더니 배가 고팠다.  그런 주제 하루에 몇 시간씩 걸으니...  유스호스텔 한가운데에 있는 공용 부엌에 누군가 쪄둔 감자가 있는 걸 보고 몇 개 훔쳐(___) 먹었는데,   내가 먹어본 감자 중 가장 맛있는 감자였다. 

그 다음에는 위배스퀼래로 갔다.  여기에서 우리 남매를 재워준 분은 채식주의자였다.  파스포르타 세르보, 즉 에스페란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국제 여행용 숙박인 명부집에서도 "나 채식주의자니까 알아서 오삼"하고 적은 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배고프지?" 하면서 채식주의자식으로 요리를 했는데 동생이 날 치면서 말했다. 

"흙 냄새가 나. 이게 진짜 사람이 먹는 음식이야!" 
(쿠오피오에서 과자를 먹고 탄산수로 위에서 불리는 식으로 버텼기 때문에 하는 말.... 나중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했다. 돈이 충분히 남았거든.)  

유럽 채식주의자들이 다 이렇게 요리하는지 모르겠지만,  당근이랑 양파 같은 채소를 물이랑 함께 통에 넣고 열을 가해서 찜을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렇게만 먹으면 맛이 없으니까 바질 양념을 쳐서 먹는데,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꿀맛이었다.  난 원래 채식주의자가 먹는 음식이라면 맛없겠거니 생각했는데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우리 남내가 아주 잘 먹었기 때문에 며칠 머무르면서 점점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야채 피자라든가,  유유를 쓰지 않고 발효시켰다는 요구르트(?)라든가.  곡물 가루에 식초랑 블루베리를 섞은 음식도 있었는데, 이건 이 아저씨가 스스로 만들어본 거라고 했다.  맛?  꽤 괜찮았다.  채식주의자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음식을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맛있게 만드는 방법을 궁리한 거다.   아저씨가 장 볼 때 함께 따라가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파젤 초콜릿을 가리키며 이거 참 맛있다고, 자기는 스위스나 벨기에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가게에 유제품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특히 요구르트가 말이지.  

핀란드는 인구가 작다 보니 특정 분야를 특정 회사가 독점한 경우가 많았다. 우유는 '발리오'라는 회사가 사실상 독점했는데 우유가 달았다. 우유가 처음부터 달 리는 없겠고,  뭔가 처리를 했겠지.  동생은 핀란드 우유를 마셔보고는 "한국 우유도 이랬으면 난 어릴 때 우유를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하고 말했다.  

핀란드 중부에 있는 시골 레스티얘르비에서는 할머니가 핀란드 가정식을 제대로 해주셔서 기억이 잘 안 난다.  다양하게 잘 먹었단 기억은 확실하지만.  동생에게 할머니가 "초코 티 먹을래?" 해서 동생이 "예" (동생은 에스페란토를 못해서 영어로 이야기함)하고 대답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더란다.  그래서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하고 동생이 주방을 봤더니 할머니가 초콜릿 덩어리를 불에 녹이고 계셨더라나 (____)  

타는 쓰레기를 오븐 안에 넣어서 그 불로 요리를 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 사우나를 했는데,  사우나 불도 장작을 태워서 했다.  할머니는 사우나를 하면 힘이 빠진다면서 미리 음식을 만들어놓고,  사우나를 하면 그걸 먹도록 했다.  그때 무슨 빵을 해주셨는데  정확히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나랑 내 동생은 그걸 카렐리안 빵이라고 부르는데,  카렐리아 지방에서 먹는 거라나?  빵이 길죽한데 가운데에 죽(?) 같은 게 들어가 있고 주변은 울퉁불퉁했다.  영어로 카렐리안 파이라고 한다나, 아마 맞을 거다.  

버터를 녹여서 자주 쓰셨던 기억이 난다.  마요네즈 같은 건 할머니는 취급하지 않는다나.  할머니 어리셨을 때 바나나라는 걸 구경한 적이 없어서 (대학교 떄문에 헬싱키에 와서야 처음 바나나를 봤다고 한다.) 지금도 별로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 우리 남매를 부르시더니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소시지를 구워먹었는데 어이쿠, 그 맛이야 말할 게 있을까!  

할머니가 여름철에 블루베리를 따서 만들었다는 잼을 빵에 발라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잼 맛이 좋았다.  


뭐.... 배가 고파서 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영길리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핀란드 음식이 그 악명 자자한 영국보다 더 맛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할머니께도 이야기를 들었는데,  할머니 어리셨을 때만 해도 겨울철이면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했다. ^^;;  겨울이 길고 농사가 잘 안 되는 지역이니 겨울이 되면  밤이 너무 길기 때문에 어른들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래서 온가족이 주로 집에, 특히 난로 앞에(_____) 앉았다고 했다.  그때 뭘 드셨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셨지만,  농사 안 되는 겨울에 먹을 건 주로 보존식이었겠지......  
      잡담  |  2013. 9. 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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