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일본군은 사실 매우 뛰어난 군대였다. 1933년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 군대와는 달리 일본군 병사 개개인부터가 군인이라는 사실에 지극히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군인정신을 실천하려 애썼다. 일상생활에서도 군인정신을 실천하는 그 기개와 고결함!  필히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니리.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사건 때부터 일본군이 얼마나 연전연승,  상승(常勝)군대가 될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은 민관군이 서로 협력하니 마치 왕망이 신을 다스림과 같았다. 


일본군은 실로 엄부자모와 같은 군대였다. 지휘관은 엄부요 부사관은 자모이니, 지휘관의 명령이 곧 천황의 명령인 줄로 알고 받들었다. 그 기강이 추상과 같아 매번 감사를 하여도 서류와 다른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고, 부분적으로 패전을 한다 하여도 단 한 명도 포로가 없었다.  설령 포로로 잡힌다 하더라도 기꺼이 할복하니 어찌 미군이 살아남은 포로의 입에서 기밀정보를 접할 수 있으랴?   병사들은 매번 메이지 천황이 내린 군인칙어를 낭송했는데 과연 칙어에서 가르친 군인상과 같았다. 또한 육해군 협력이 잘 되어 서로 공을 다투지 않고 매번 서로를 추어올리니,  상앙이 진을 돌볼 때에도 이처럼 기강이 서릿발 같지 않았고,  주문왕이 주를 다스릴 때에도 서로를 아낌이 이렇지 않았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모두가 용맹하여 감히 '후퇴'라든가 '패배'라든가 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오직 '진격'  '돌격'  '승리'란 말을 입에 담았을 뿐이다.  미국 군인들은 일본인보다 기골이 장대하다 하나 정신력이 약하여 매번 후퇴니 작전이니 하는 말을 해대니,  일본군에 맞서 총칼에 찢긴 어육이 되었을 뿐이다.   일본군 병사들과 지휘관이 혼연일체가 되니 위나라 오기를 위하여 병사들이 몸을 바쳤다 한들 이와 같으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력적으로 우월한 미군을 상대로 얼마나 통쾌한 일격을 양인들의 오만한 콧대에 날렸던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은 지략이 깊고 용맹하여 조괄이 진과 맞섬과 같았다.  그 이름은 일본사에 길이 빛나 천추에 남았으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다. 조괄은 단 한 번 실패로 안타깝게 전사하였으나,  무타구치 장군은 오래도록 일본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웠으니 기실은 조괄보다 낫다 하겠다.  특히 임팔 작전은 무타구치 장군의 자랑이라 할 만한 업적으로,  비록 적장이라 하나 두고 두고 칭송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일본의 명재상,  도조 히데키 총리를 추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도조 총리는 험난한 때에 군주에게 충성함은 범려라 하여도 이와 같지 않으며, 형국을 조망하여 국운을 개척하는 데에는 제갈량이 온다 하여도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 가사도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 조국이 위태할 때 군권까지 장악하여 좀스러운 자들이 감히 국사에 관여치 못하게 하였고,  시의적절한 때에 진주만을 공격하니,  아둔한 미국인들마저 일본이란 이름을 들으면 오금을 저렸다. 대본영을 이끌어 전쟁을 지휘함에 있어 지혜와 통찰력이 심원하니 손무가 살아온다 해도 이같지 않을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이러한 저력이 빛을 발하니 일본 해군은 전설이 될 만한 공격력과 전술로 용맹하게 달려들어 미 해군을 궤멸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해저로 가라앉았던 항공모함을 인양해서 진격하는' 듯이 진격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도조 총리는 전진훈에서 군인들이 패배하더라도 결코 포로가 되지 말고 할복하기를 명하였다.  일본이 핵을 두 번이나 맞은 뒤 시세가 기울어 항복할 때에도 도조 총리는 정치인이자 또한 군인으로서 용맹스러이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도조 총리와 같은 사람이 자살에 실패하여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함은 언어도단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뛰어난 군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배한 것은 오직 미국이 자금력과 기술력으로 핵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독일측 과학자들이 돕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허나 적어도 재래전력으로서 일본은 정신력이야말로 야마토 남아의 힘임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대한의 군대도 비록 원수라 하나 이러한 일본군의 전례를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 본 포스팅은 중국사와 일본 근대사를 알아야 웃을 수 있도록 최적화되었습니다. 
* 왕망, 조괄, 가사도:  전부 자기 나라를 망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중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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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사회단상  |  2013. 8. 16. 00:43




Mi pensas ke drako-regxo de Han-gang rivero estas la plej ricxa el cxiuj tradiciaj dioj.  Aliaj ne povas akcepti iun de homoj pro tio ke Kristianoj aux ateistoj estas pli multigxinta ol ili estis. Sed  la drako-regxo estas malsama kun ili. Almenaux kvin homoj sakraficias sin po unu tago al li, speciale sur Mapo-granda-ponto, cxu ne? Neniu povas paroli  "li ne estas beata". 

      역사/사회단상  |  2013. 8. 3. 01:11




예전에 심심파적 삼아 무작위로 받아둔 논문을 하나 읽어봤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애즈베리가 가지고 있던 '경건'에 대한 개념과 초점은 웨슬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애즈베리는 '성례'와 '고정된 기도'에 경건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설교'와 '훈련된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초기 미 감리교회에서의 성만찬의 거행은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히크만은 미국의 일요일 예배에서 성만찬이 포기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자세한 상황과 이유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미국 감리교의 초기에는 성만찬을 집례 할 안수 받은 장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미국 감리교회 초기의 회중들은 안수 받은 장로가 주관하는 하는(일년에 서너 번) 집회에서만 성찬의 신비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의 다른 개신 교단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에 대한 경향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다른 개신교단에서도 성만찬의 거행은 빈번하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리교도들은 그 당시 다른 개신 교단들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 이해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감하였다고 한다. 보편적으로 이해되었던 성만찬에 대한 인식은 성만찬이 신적인 것의 '대리'적이 상징일 뿐인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로써의 설교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세 번쨰로 우리가 보게 되는 그 당시 성만찬의 한계는 선교지인 미국에서의 감리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고정된 본문을 읽는 형태의 성만찬의 예식은 그 당시 구두(口頭) 문화에 익숙한 미 감리교인들에게 어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설교 중심의 예배와의 조화에 있어서도 삐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네 번째로는 성만찬에 대한 부담스러운 회개의 조항들 때문이었다고 히크만은 지적한다. 특히 이러한 조항들은 성만찬을 가치 없게 받을 떄에 대한 경고와 결합했는데, 이러한 조항들은 미 개척시대의 감리교인들이 성만찬을 매주 받기에는 부담스럽게 작용했다. 오히려 그들은 일 년에 드물게 거행되는 성만찬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하는데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찬이 가지고 있던 참회의 성격이 점차 강하게 나타남으로 인해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의미를 강조했던 웨슬리 전통은 미 감리교회서 사라져 갔다.


전창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연합감리교회 예배의 변화: '성찬 감사 기도'를 중심으로", <<신학과 실천>> 27 (2011년): 55-84.
(인용문에서 오타는 원문 그대로.)



한국 개신교에서 성만찬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미국 선교사들 영향이겠군. 그런데 편집부 누구냐.  아무도 안 읽어봤나. 오타가 곳곳에서 나오네.  그리고 난 왜 이런 걸 심심파적으로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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