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바오로. 수도복 왼편에 수도회 문장이 달려 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계시적으로 보았다는 예수고난회 문장.

이 문장 또한 예수 성심을 연상케 하는 심장 형태다.

JESU XPI PASSIO라는 문장은 라틴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라틴어로 CHRISTI라고 써야 했겠지만, 

문장의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근을 그리스어 약자로 써서 XP라고만 쓰고

위에 거룩한 단어의 약자임을 뜻하는 막대를 그렸다.

동방교회의 이콘에서 흔히 보이는 방법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1694~1775)가 1720년쯤에 훗날 예수고난회(Passionists)의 상징이 되는 문장을 환시로 목격한다. 또한 나중에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이 "너는 내 거룩한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끊임없이 슬퍼하는 수도회를 설립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1741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예수고난회 회칙을 인준하면서 "교회에서 제일 먼저 창설되었어야 할 수도회가 이제서야 나타났다"라고 하였다. 물론 새 수도회를 인준하면서 축복하는 말을 한 것일 터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함은 특히 중세-르네상스기의 영성에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적지 않다. 고통을 묵상하다 못해 일체함은 성흔이라는 기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흔을 받은 최초의 인물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한다. 현대인 중에는 이탈리아 사람인 오상의 성 비오 신부(1887~1968)가 있다. 생전에 예수고난회 수녀가 되길 바랐던 성녀 젬마 갈가니(1878~1903) 역시 몇 년 동안 성흔이 있었으며, 특히 금요일이면 성흔이 뚜렷해지고 고통도 심해졌다고 한다. 


나는 가톨릭 신앙생활이나 영성에서 고통을 묵상함은 '연대'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고통을 함께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만약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한다면 동지애(?)나 연대감(?)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특히 예수 성심(聖心) 신심에서 드러난다. 이 신심은 프랑스의 성녀 마르가리타 알라코크(1647~1690)가 1673년부터 접했다는 환시를 계기로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이 신심은 예수님이 게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시기 직전인 성 목요일 밤, 예수님이 심란해하며 기도하셨으나 사도들은 같이 깨어 있지 못하였으니, 매주 목요일 밤에 한 시간만이라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기도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성에 집중하는 신심으로 예수님의 내적 고통을 위로하려고 한다.



예수 성심을 그린 전통적인 성화


 이 신심의 상징은 불타는 심장이다. 실제 심장 위치는 가슴 한가운데가 아니라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성화에서는 흔히 가슴 한가운데에 그린다. 심장의 실제 위치와 달라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실제 심장이 아니라 '거룩한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룩한 마음은 인간의 죄악에 고통받고 슬퍼하므로, 신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아예 이 심장만 따로 떼어 표지로 삼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성 안니발레 신부가 1887년에 '거룩한 열정의 딸 수녀회'를 창설하며 도안한 문장.

성 안니발레가 평생의 모토로 삼은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라는,

불가타 성경에서 인용한 글귀가 심장을 둘렀다.   



예수 성심 신심은 아주 쉽게 성모신심과 결합하였다. 천주교 신심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가 "성모님은 예수님께 깊이 일치하셨고 고통도 내적으로 함께 하셨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선 꽤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논픽션 '더 라이트'에서 2차 인용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구마사제인 바몬테 신부가 장엄구마를 하면서 악마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을 녹음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 밑에서 그녀(성모님)는 그리스도가 흘리는 피를 두 손으로 모았고 그 두 손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녀는 하느님을 찬양했고 감사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분을 용서했고 사랑했으며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같이 고통을 느끼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았고 나(악마)는 고통받았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크게 기뻐하고자 했지만 그녀는 우리를 자신의 울음으로 죽게 했다. 그녀의 눈물은 우리를 죽이는 불과 같다." 


이 말을 했다는 사람이 정말로 악마에 씌어서 이러했는지는 따지지 말자. 다만 이 내용은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이 성모신심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수님의 고통에 연대하면서, 또한 예수님의 고통을 보고 고통받았던 성모님의 고통에도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에 집중하는 신심이 성모신심과 연계됨은 어떤 의미로는 차라리 필연이었다.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중 '칠락 묵주'(성모님 일생의 일곱 가지 즐거움을 묵상하는 기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칠고 묵주'(성모님 일생의 일곱 가지 큰 고통을 묵상하는 기도)가 더 환영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 성심 신심과 마찬가지로 성모 성심에 대한 것도 나타났다. 



성모성심을 흔히 칼에 찔린 모양으로 그린다. 

루카 복음서에서 시메온이 "그대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 성심 신심은 기존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방식으로 전개됐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하느님 자비의 신심'을 든다. 이것은 폴란드 수녀인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성녀가 환시를 받아 전했다고 한다. 




위 그림은 파우스티나 성녀가 1931년에 받았다는 환시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가슴에서 두 갈래 빛이 나오는데, 파우스티나 성녀에 따르면 이는 예수님 십자가 고난 때 로마 군인의 창에 옆구리가 찔리면서 나온 물과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갈래 빛은 옆구리에서 나와야 정상일 것 같지만 심장 부위에서 나온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보고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 성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예수 성심 신심은 예수님의 고통을 위로하길 바라는 것이지만 자비 신심은 다르다. 고통을 감내할 정도인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마음에 의탁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신심이 '하느님 자비의 신심'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Divine mercy라고 불린다. 이전의 신심에서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가슴 아플 정도의 일체화를 추구했던 반면, 이 신심은 그런 고통을 감내할 정도인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죄의 용서를 구한다. 대체로 중세-르네상스기에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엄격해져서 '정의만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성모신심은 특히 이러는 와중에 강화됐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벌하고자 하나, 자비로운 성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벌을 유보한다는 식의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그러나 자비 신심은 그 이름대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는 과거의 유산(?)과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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