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심심파적 삼아 무작위로 받아둔 논문을 하나 읽어봤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애즈베리가 가지고 있던 '경건'에 대한 개념과 초점은 웨슬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애즈베리는 '성례'와 '고정된 기도'에 경건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설교'와 '훈련된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초기 미 감리교회에서의 성만찬의 거행은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히크만은 미국의 일요일 예배에서 성만찬이 포기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자세한 상황과 이유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미국 감리교의 초기에는 성만찬을 집례 할 안수 받은 장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미국 감리교회 초기의 회중들은 안수 받은 장로가 주관하는 하는(일년에 서너 번) 집회에서만 성찬의 신비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의 다른 개신 교단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에 대한 경향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다른 개신교단에서도 성만찬의 거행은 빈번하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리교도들은 그 당시 다른 개신 교단들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 이해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감하였다고 한다. 보편적으로 이해되었던 성만찬에 대한 인식은 성만찬이 신적인 것의 '대리'적이 상징일 뿐인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로써의 설교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세 번쨰로 우리가 보게 되는 그 당시 성만찬의 한계는 선교지인 미국에서의 감리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고정된 본문을 읽는 형태의 성만찬의 예식은 그 당시 구두(口頭) 문화에 익숙한 미 감리교인들에게 어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설교 중심의 예배와의 조화에 있어서도 삐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네 번째로는 성만찬에 대한 부담스러운 회개의 조항들 때문이었다고 히크만은 지적한다. 특히 이러한 조항들은 성만찬을 가치 없게 받을 떄에 대한 경고와 결합했는데, 이러한 조항들은 미 개척시대의 감리교인들이 성만찬을 매주 받기에는 부담스럽게 작용했다. 오히려 그들은 일 년에 드물게 거행되는 성만찬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하는데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찬이 가지고 있던 참회의 성격이 점차 강하게 나타남으로 인해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의미를 강조했던 웨슬리 전통은 미 감리교회서 사라져 갔다.


전창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연합감리교회 예배의 변화: '성찬 감사 기도'를 중심으로", <<신학과 실천>> 27 (2011년): 55-84.
(인용문에서 오타는 원문 그대로.)



한국 개신교에서 성만찬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미국 선교사들 영향이겠군. 그런데 편집부 누구냐.  아무도 안 읽어봤나. 오타가 곳곳에서 나오네.  그리고 난 왜 이런 걸 심심파적으로 읽는 거지.





'전례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금요일 예식, 반유대주의  (0) 2013.09.29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0) 2013.07.19
예수님의 고통  (0) 2013.07.19
그런저런 이야기  (0) 2013.06.30
아나포라 제4 양식  (0) 2013.06.30
      전례사/교회사  |  2013. 7. 26. 21:04



에스페로스's Blog is powered 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