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은 한국 천주교에서 부활절 전 금요일,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이 날은 미사를 거행하지 않고 대신 '주님 수난 예식'이라는 것을 한다. 이것은 미사가 아니다.  겁나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 독서 

보편지향기도(신자들의 공동 기도) 

보관 중인 성체 영하기(먹기)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성경을 읽는 부분에서는 세 부분을 읽는데, 마지막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부분을 읽되, 여러 사람이 역할을 분담한다.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맡고, 그 외에 서술을 담당하는 사람, 군중이나 빌라도의 말 등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이 뒤에 공동 기도를 들어간다. 


원래 로마 미사에서는 거의 1500년간 내가 '신자들의 공동 기도'라고 표현한 부분이 없었다. 초기에는 있었으나 6세기경쯤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동방전례에서도 사라졌다. 이 시기 공동기도 방식은 주교나 사제가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면, 신자들이 정해진 화답문구(가령 키레에 엘레이손 등)를 외치는 형식이었다. 특히 기도주제로는 예비신자들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전례개혁 때 보편지향기도를 되살리면서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주도하는 기도로 촛점을 바꾸었다. 

(추정컨데, 이 보편지향기도가 사라진 이유는 예비신자가 줄어들었고, 성찬감사기도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포함되면서 입지가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로마 미사에서 초기 공동 기도 양식을 보존하고 있던 부분이 바로 성 금요일에 하는 '주님 수난 예식' 부분이었다. 여기서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사제가 먼저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면 여전히 신자들이 화답하는 방식으로 7-8가지 주제를 청원했다. 기도 주제는 가톨릭 교회, 교황, 성직자와 수도자, 국가, 이단 소멸(___) 등이고, 거기에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도 있었다. 


이때 기도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사제가' XXX 주제로 기도합시다' 하고 서두를 떼면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일어선다. 그 뒤에 사제가 하느님, ~~~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면, 신자들이 "아멘"하고 화답한다. 


그런데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무릎을 꿇는 부분이 없이 바로 사제가 기도를 했다. 미사경본에 있는 주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예수님을 무릎 꿇게 하고 핍박했으니 여기서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기도문에서도 "하느님꼐서는 유태인들에게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건 유태인들에게 그만큼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우셔서 역시 허락하신다...하는 의미가 전재됐다. 당연히 유태인들을 낮추어보는 의미가 전제된 것이다.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 다음에는 비신자(Paganus)를 위한 기도가 있는데. 여기서는 무릎을 꿇는 부분이 있다. 유태인들은 여기서 비신자들보다도 더 낮게 잡힌 것이다.  

그래서 복자 요한 23세께서는 1962년에 트리덴티노 미사 전례서를 고치시면서 이 부분을 수정하였다. 즉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무릎을 꿇게 하고, 기도문에서도 "유태인들에게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하는 구절을 없앴다. 


그리고 1970년 전례개혁에서는 아예 성 금요일 전례 중 보편지향기도에서 무릎을 꿇는 부분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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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심심파적 삼아 무작위로 받아둔 논문을 하나 읽어봤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애즈베리가 가지고 있던 '경건'에 대한 개념과 초점은 웨슬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애즈베리는 '성례'와 '고정된 기도'에 경건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설교'와 '훈련된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초기 미 감리교회에서의 성만찬의 거행은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히크만은 미국의 일요일 예배에서 성만찬이 포기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자세한 상황과 이유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미국 감리교의 초기에는 성만찬을 집례 할 안수 받은 장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미국 감리교회 초기의 회중들은 안수 받은 장로가 주관하는 하는(일년에 서너 번) 집회에서만 성찬의 신비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의 다른 개신 교단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에 대한 경향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다른 개신교단에서도 성만찬의 거행은 빈번하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리교도들은 그 당시 다른 개신 교단들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 이해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감하였다고 한다. 보편적으로 이해되었던 성만찬에 대한 인식은 성만찬이 신적인 것의 '대리'적이 상징일 뿐인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로써의 설교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세 번쨰로 우리가 보게 되는 그 당시 성만찬의 한계는 선교지인 미국에서의 감리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고정된 본문을 읽는 형태의 성만찬의 예식은 그 당시 구두(口頭) 문화에 익숙한 미 감리교인들에게 어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설교 중심의 예배와의 조화에 있어서도 삐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네 번째로는 성만찬에 대한 부담스러운 회개의 조항들 때문이었다고 히크만은 지적한다. 특히 이러한 조항들은 성만찬을 가치 없게 받을 떄에 대한 경고와 결합했는데, 이러한 조항들은 미 개척시대의 감리교인들이 성만찬을 매주 받기에는 부담스럽게 작용했다. 오히려 그들은 일 년에 드물게 거행되는 성만찬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하는데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찬이 가지고 있던 참회의 성격이 점차 강하게 나타남으로 인해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의미를 강조했던 웨슬리 전통은 미 감리교회서 사라져 갔다.


전창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연합감리교회 예배의 변화: '성찬 감사 기도'를 중심으로", <<신학과 실천>> 27 (2011년): 55-84.
(인용문에서 오타는 원문 그대로.)



한국 개신교에서 성만찬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미국 선교사들 영향이겠군. 그런데 편집부 누구냐.  아무도 안 읽어봤나. 오타가 곳곳에서 나오네.  그리고 난 왜 이런 걸 심심파적으로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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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영어로 Leonine prayer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마 전례에서는 1970년 전례개혁 이전까지 평미사(노래하는 등 장엄예식이 없이 거행한 미사, 대개 평일에 미사드리거나 사제 혼자, 혹은 복사만 데리고 미사 드릴 때 이렇게 했다. 전례개혁 이전까지는 가장 흔한 미사 형태이고 했다.) 후에는 미사의 마무리 기도까지 모두 마치고도 몇 가지 추가적인 기도를 더 했다.  이 기도는 원칙적으로는 미사에 속하지 않지만 빼먹질 않았으므로 사실상 미사의 진정한 마지막 예식이었다. 


성모송 세 번

성모찬송경(Salve Regina)+교회를 위한 기도 (하나의 기도인데 전반부는 성모찬송경이고 후반부는 교회를 위한 기도로 구성돼 있다.)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이중 마지막 기도는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가 환상을 본 뒤 작성한 기도로 유명하다.  레오 13세는 어느날 좌중이 있는 자리에서 기도 중에 느닷없이 환상을 보았는데, 악마가 하느님 앞에서 백 년만 시간을 준다면 교회를 유린할 수 있노라 장담했다는 내용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레오 13세는 특별히 미카엘 대천사에게 악마를 지옥으로 던져달라는 내용으로 기도문을 작성해서, 평미사를 마친 뒤 드리는 기도의 마지막에 덧붙였다.  레오 13세는 손수 이 기도를 작성했고 즐겨 바쳤다고 전해지는데, 후임 교황 비오 12세인가(기억이 가물) 이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 성심께 드리는 단원을 다시 덧붙였다.  이 기도는 꼭 미사 때가 아니더라도 바치면 3년 한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하지만 이 기도문 작성은 전례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악마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싶었던 레오 13세의 뜻과는 별개로, 미사라는 종교의례의 구조를 흐트러놓았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사가 마무리되면 정말로' 끝이 나야' 하는데, 원직적으로는 끝이 났는데도 다른 기도문이 덧붙여져 사실상 미사의 마무리 의식 노릇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그래서 있는 기도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판에 다른 기도를 덧붙였으니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기도는 1970년에 발표된 전례개혁 이전까지 평미사 후 마무리 기도로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이 기도문에 붙어 있던 한대사도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조치로 삭제되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3년 한대사라느니 300일 한대사라느니 하는 햇수를 없앴다. 한대사는 그냥 한대사일 뿐 다른 구분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와는 별개로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전히 교회를 위해서 이 기도를 가급적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매일 바쳐주기를 바랐다. 


Sancte Michael archangele, defende nos in praelio: contra nequitiam et insidias  diaboli esto praesidium.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 tuque, Princeps militiae caelestis, satanam aliosque spiritus malignos,  qui ad perditionem animarum pervagantur in mundo, divina virtute in infernum detrude, Amen.

(Cor Iesu sacratissimum, miserere nobis)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인 번역문은 이러하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 그리고 천상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번역문에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라고 된 부분은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의 번역인데,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그자에게 명령하시기를 겸손되이 청하나이다" 정도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지 원문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각국어 번역판을 보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악마를 억제해 달라는 내용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번역하든 악마를 엿먹여 달리는 쪽으로 번역함은 다들 똑같다. 


나는 이 기도문을 보고 레오 13세가 환상을 보았단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별로 길지도 않은 기도문이 상당히 산만하게 작성됐다.  처음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기도하다가 중간에 하느님으로 대상이 바뀌어 한 문장, 그리고 다시 미카엘 대천사로 대상이 바뀐다. 


레오 13세 교황님은 잘 배운 지식인인데 별로 길지도 않은 기도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산만하다니, 이 기도문을 작성할 때 정말로 굉장히 심란했던 거라고 보고 있다. 

(2012/02/08 2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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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바오로. 수도복 왼편에 수도회 문장이 달려 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계시적으로 보았다는 예수고난회 문장.

이 문장 또한 예수 성심을 연상케 하는 심장 형태다.

JESU XPI PASSIO라는 문장은 라틴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라틴어로 CHRISTI라고 써야 했겠지만, 

문장의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근을 그리스어 약자로 써서 XP라고만 쓰고

위에 거룩한 단어의 약자임을 뜻하는 막대를 그렸다.

동방교회의 이콘에서 흔히 보이는 방법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1694~1775)가 1720년쯤에 훗날 예수고난회(Passionists)의 상징이 되는 문장을 환시로 목격한다. 또한 나중에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이 "너는 내 거룩한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끊임없이 슬퍼하는 수도회를 설립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1741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예수고난회 회칙을 인준하면서 "교회에서 제일 먼저 창설되었어야 할 수도회가 이제서야 나타났다"라고 하였다. 물론 새 수도회를 인준하면서 축복하는 말을 한 것일 터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함은 특히 중세-르네상스기의 영성에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적지 않다. 고통을 묵상하다 못해 일체함은 성흔이라는 기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흔을 받은 최초의 인물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한다. 현대인 중에는 이탈리아 사람인 오상의 성 비오 신부(1887~1968)가 있다. 생전에 예수고난회 수녀가 되길 바랐던 성녀 젬마 갈가니(1878~1903) 역시 몇 년 동안 성흔이 있었으며, 특히 금요일이면 성흔이 뚜렷해지고 고통도 심해졌다고 한다. 


나는 가톨릭 신앙생활이나 영성에서 고통을 묵상함은 '연대'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고통을 함께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만약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한다면 동지애(?)나 연대감(?)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특히 예수 성심(聖心) 신심에서 드러난다. 이 신심은 프랑스의 성녀 마르가리타 알라코크(1647~1690)가 1673년부터 접했다는 환시를 계기로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이 신심은 예수님이 게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시기 직전인 성 목요일 밤, 예수님이 심란해하며 기도하셨으나 사도들은 같이 깨어 있지 못하였으니, 매주 목요일 밤에 한 시간만이라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기도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성에 집중하는 신심으로 예수님의 내적 고통을 위로하려고 한다.



예수 성심을 그린 전통적인 성화


 이 신심의 상징은 불타는 심장이다. 실제 심장 위치는 가슴 한가운데가 아니라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성화에서는 흔히 가슴 한가운데에 그린다. 심장의 실제 위치와 달라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실제 심장이 아니라 '거룩한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룩한 마음은 인간의 죄악에 고통받고 슬퍼하므로, 신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아예 이 심장만 따로 떼어 표지로 삼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성 안니발레 신부가 1887년에 '거룩한 열정의 딸 수녀회'를 창설하며 도안한 문장.

성 안니발레가 평생의 모토로 삼은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라는,

불가타 성경에서 인용한 글귀가 심장을 둘렀다.   



예수 성심 신심은 아주 쉽게 성모신심과 결합하였다. 천주교 신심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가 "성모님은 예수님께 깊이 일치하셨고 고통도 내적으로 함께 하셨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선 꽤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논픽션 '더 라이트'에서 2차 인용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구마사제인 바몬테 신부가 장엄구마를 하면서 악마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을 녹음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 밑에서 그녀(성모님)는 그리스도가 흘리는 피를 두 손으로 모았고 그 두 손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녀는 하느님을 찬양했고 감사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분을 용서했고 사랑했으며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같이 고통을 느끼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았고 나(악마)는 고통받았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크게 기뻐하고자 했지만 그녀는 우리를 자신의 울음으로 죽게 했다. 그녀의 눈물은 우리를 죽이는 불과 같다." 


이 말을 했다는 사람이 정말로 악마에 씌어서 이러했는지는 따지지 말자. 다만 이 내용은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이 성모신심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수님의 고통에 연대하면서, 또한 예수님의 고통을 보고 고통받았던 성모님의 고통에도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에 집중하는 신심이 성모신심과 연계됨은 어떤 의미로는 차라리 필연이었다.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중 '칠락 묵주'(성모님 일생의 일곱 가지 즐거움을 묵상하는 기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칠고 묵주'(성모님 일생의 일곱 가지 큰 고통을 묵상하는 기도)가 더 환영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 성심 신심과 마찬가지로 성모 성심에 대한 것도 나타났다. 



성모성심을 흔히 칼에 찔린 모양으로 그린다. 

루카 복음서에서 시메온이 "그대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 성심 신심은 기존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방식으로 전개됐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하느님 자비의 신심'을 든다. 이것은 폴란드 수녀인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성녀가 환시를 받아 전했다고 한다. 




위 그림은 파우스티나 성녀가 1931년에 받았다는 환시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가슴에서 두 갈래 빛이 나오는데, 파우스티나 성녀에 따르면 이는 예수님 십자가 고난 때 로마 군인의 창에 옆구리가 찔리면서 나온 물과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갈래 빛은 옆구리에서 나와야 정상일 것 같지만 심장 부위에서 나온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보고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 성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예수 성심 신심은 예수님의 고통을 위로하길 바라는 것이지만 자비 신심은 다르다. 고통을 감내할 정도인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마음에 의탁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신심이 '하느님 자비의 신심'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Divine mercy라고 불린다. 이전의 신심에서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가슴 아플 정도의 일체화를 추구했던 반면, 이 신심은 그런 고통을 감내할 정도인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죄의 용서를 구한다. 대체로 중세-르네상스기에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엄격해져서 '정의만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성모신심은 특히 이러는 와중에 강화됐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벌하고자 하나, 자비로운 성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벌을 유보한다는 식의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그러나 자비 신심은 그 이름대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는 과거의 유산(?)과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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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신심 깊다는 G군과 머리 좋다는 T군이 싸웠다. 


G군: 하느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신다구요? ㅋㅋㅋ 그거 뭔 부조리한 헛소리임? 하느님은 지극정성으로 금욕하지 않으면 모조리 불지옥 크리, ㄲㄲㄲ 나처럼 정결하게 살으3 


 T군: 아 ㅆㅂ 이 정줄놓아, 부조리라고 할 만큼 사랑이 넘친 분이니까 믿을 만하다는 거다. 


나중에 T군이 한 말은 "믿음이란 부조리하니까 믿어야 한다"로 잘못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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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미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성경 말씀을 읽고 듣는 말씀전례와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전례가 그 둘이다.  이중 중심은 성찬전례에 있으며, 1970년 전례개혁 이전까지는 성찬전례만을 강조하고 말씀전례를 홀대함이 너무 지나쳐서 1년 내내 미사 중에 성경을 읽는 부분보다 안 읽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았으며,  중요한 부분을 읽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구약의 경우 대부분 안 읽었다고 한다.  전례개혁 이후 말씀전례를 대폭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성찬전례를 덜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중히 여길 뿐이다. 


성찬전례 때 먼저 성부께 지극히 감사기도를 드리며,  성령이 임하시기를 청한 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셨던 행동을 말씀을 재현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정통성을 지킬 수만 있다면 사제가 자유로이 기도문을 창작하여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도문을 중요하게 여긴 관계로 점차 기도문을 고정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양식은 전례마다 서로 다르지만 기본구조는 모두 비슷하다.  비잔틴 전례를 포함한 동방전례(동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가 발전시킨 전례양식)에서는 성찬전례 기도문이 여럿이다.  세 개가 있는 곳이 있고,  네 개가 있는 곳도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서른 개가 있기도 한단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어떤 기도문을 쓰고,  특별한 날에는 어떤 기도문을 쓰는지 지정해두었다.  이 성찬전례 기도문을 그리스어로 '아나포라'라고 부르는데,  나 또한 이 말을 즐겨 쓴다.  아나포라를 '감사기도'라고도 번역하지만, 혼동할 여지가 많아 잘 쓰지 않는다. 


서방전례, 특히 로마 전례는 아나포라가 단 하나만 있었다.  동방전례가 여러 가지 아나포라를 돌려 쓰는데 반해,  로마 전례는 365일 내내 한 가지 아나포라만 사용했다.  이 아나포라를 '로마 전문'이라고도 부른다.  로마 전례에서는 아나포라가 하나인 대신, 아나포라 중 맨 앞에 있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부분(감사송)이 매우 발달하여 언제 어느 감사송을 쓸지를 지정해두었다.  감사송이 많을 때는 거의 매일 그 날의 고유한 감사송이 있었다는데,  쓸데없이 감사송이 많다 보니 내용이 엉망인 것도 많아서 나중에 교회가 대폭 줄였다.  고유한 감사송이 없는 날은 집전자 마음에 따라 적당한 감사송을 골라 쓸 수 있다. 


1970년 전례개혁 때 이러한 로마 전례의 특성을 대폭 바꾸었다.  처음에는 로마 전문을 대폭 개정할 생각이었지만,  전통을 존중하여 로마 전문은 최소한으로만 바꾸고 그대로 내두었다. 그 대신 다른 아나포라를 세 개 더 추가하고,  그 외에도 특수상황에서 쓸 수 있는 아나포라를 따로 추가했다.  로마 전문은 제1양식이라고 부른다.  추가된 세 양식은 제2, 제3, 제4 양식이라고 부른다.  제2양식은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에 나오는 아나포라 요약문을 수정했는데 매우 간단하며, 아나포라 기도문의 중요부분만을 요약하여 제시했다.  요약인 만큼 길이가 짧아서 오늘날 사제들이 매우 즐겨 사용한다.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다.  제3양식은 바가지니란 전례학자가 제시한 기도문을 참고했는데,  로마 전례의 전통을 대폭 반영하여 '수정 로마전문'이라고까지 불린다.  그러면서도 로마 전문의 단점을 보완하여 매우 완성도 있고, 특히 주일 미사 때 적합하다.  


아나포라 제4양식은 매우 특이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나포라 제4양식은 동방전례에 속하는 안티오키아 전례에서 사용하는 아나포라를 모범으로 삼아 내용을 줄이고 라틴어로 번역하고 수정한 기도문이다.  그러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제1양식부터 제3양식까지는 모두 로마 전례의 전통에 따라 감사송을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제4양식은 동방전례를 따랐기 때문에 감사송 부분을 바꾸지 못한다.  아나포라 전체가 하나로 된 '통짜 기도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감사송을 사용해야 될 날에는 제4양식을 쓸 수가 없다.  제한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기도문의 앞뒤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가장 유기적이다.  그뿐 아니라 동방전례의 특징이 반영되어 기도문이 매우 문학적이고 장엄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냥하다.  


제1양식(로마전문)에서는 이런 부분이 있다.  

"먼저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위하여 이 예물을 바치오니 (중략)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보편 신앙을 오롯이 받드는 모든 이를 돌보시어...(하략)"


아나포라 기도문이 은총받기를 기원하는 대상이 가톨릭 신자만으로 한정돼 있다.  이런 점을 인식하여 2,3 양식에서는 가톨릭 교회만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도 은총을 청한다.  하지만 제4양식은 정말로  상냥하게 모두를 위해 기원한다. 


"주님, 저희가 이 제물을 바치며 기억하는 이들을 모두 생각하여 주소서. 특히 주님의 일꾼, 교황 (    )와 저희 주교 (   )와 세계의 모든 주교와 성직자와 이 제사를 봉헌하는 이와 여기 모인 이들, 그리고 주님의 온 백성과 진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도 모두 생각하여 주소서. 또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잠든 교우들과 주님만이 그 믿음을 아시는 죽은 이들도 모두 생각하소서"


 진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  주님많이 그 믿음을 아시는 죽은 이.   이는 비그리스도교 신자까지도 염두에 둔 따뜻하고 상냥한 구절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아나포라를 읽다가 정말로 상냥한 구절이라고 그 구절만 거듭 읽었다.  또한 하느님을 찬양하는 부분은 실로 장엄하여 그 분위기가 다른 아나포라와 다르다. 


"아버지 홀로 살아계신 참 하느님이시고 영원으로부터 무궁히 계시며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머무시나이다. 또한 생명의 샘이시며 지선하신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어 온갖 복을 가득히 내려주시고 밝은 빛으로 기쁨을 주시나이다."


예로 든 구절이 이 정도다.  신자들 대다수가 제2양식에 익숙한데,  제2양식에서는 이러한 문학적 묘사가 없다 (당연하다.  원래 요약적인 기도문이니까) .    하지만 이 기도문은 특별한 감사송이 있는 날에는 쓸 수 없거니와,  길이가 가장 길어서 사제조차도 별로 쓰지 않는다.  나도 이 아나포라를 미사 중에 실제로 들어보기는 딱 한 번이었다.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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