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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 무나카타 3위신에 대한 일본서기 본문과 일서를 정리한 바 있다. 그런데 본문과 일서의 전승이 미묘한 부분에서 차이가 많아서,  최초의 전승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내가 이쪽으로는 지식이 없지만, 일단 일본서기 내의 기록만을 바탕으로,  내 나름대로 이야기의 원형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정한 원칙은 이러하다. 


1. 단순한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다.

2. 신화 내 캐릭터들의 성격이 일관된 쪽이 원형에 가깝다. 

3. 아마테라스 여신을 띄워주는 이야기는 원형과 멀다. 

4. 현실역사에서 후대의 사실이 전제되어야 이해되는 부분은 원형과 멀다. 



스사노오가 다카마노하라로 올라올 때 '하카루타마'라는 신이 스사노오에게 구슬을 바쳤다는 6-2의 요소는 1번과 2번에 근거해서 무시한다. 스사노오는 자발적으로 구슬을 바치려고 할 만한 순순한 신이 아니다. 게다가 '하카루타마'라는 이름 자체가 작위적이라 1번에 어긋난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천상의 강가에서 서로 대치하였을 때, 맹세하자는 말을 아마테라스가 꺼냈다는 6-1, 6-3의 요소는 2번과 3번에 근거해서 무시한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자기를 다치게 했을 때에도 동굴에 스스로 들어갈 정도로 소극적이며,  유명한 천손강림 전승에서도 아마테라스가 주도하는 전승은 후대의 것이다.  또한 스사노오는 난폭하며 할 말은 하고 사는(___) 신이므로,  주도적인 역할을 스사노오가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맹세를 할 때에 서로 물건을 바꾸었다는 6-0, 6-2의 전승은 1번에 근거하여 무시한다.


아마테라스가 맹세할 때에 스사노오에게 "네가 남신을 낳는다면 그 아이가 하늘을 다스리게 하겠다."라고 말했다는 6-3의 전승은 1번과 2번에 근거하여 무시한다. 아마테라스가 자기 말고 다른 신이 하늘을 지배하게 한다는 이야기는 성격에 맞지 않으며,  또한 이야기 자체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요소다. 


스사노오가 구슬을,  아마테라스가 검을 씹어서 신을 낳았다는 6-0, 6-1, 6-3의 전승은 4번 원칙을 깨고 무시한다. 무나카타 3여신이 아마테라스에게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이미 무나카타 씨가 야마토 조정에 포섭된 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슬이 검보다 더 '고귀한' 상징인데,  스사노오가 낳은 5위 남신보다는 아마테라스가 낳은 3위 여신을, 일본서기에서 더 많이 신경 쓴다. 그러므로 6-2 전승과 마찬가지로 아마테라스가 구슬을 씹었다는 이야기를 원형에 가깝다고 본다. 


스사노오가 낳았다는 신은 5위가 맞을 것이다. 6위라는 일본서기 6-3의 전승을 무시한다. (애당초 6-3의 전승은 전반적으로 매우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아마테라스가 3위 여신을 무나타카로 보내면서 "해로 가운데에서 천손을 돕고, 천손의 제사를 받아라."라고 이야기했다는 부분은 야마토 조정이 무나카타 여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제사지내던 후대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되었으므로, 1번과 4번에 근거해서 무시한다. 


추가: 고사기의 해당 부분에서는 흥미로운 변형이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 내 모든 전승에서는 '남신이 나오면' 스사노오가 결백하다고 서약(우케이) 전에 미리 정하고, 그에 따라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고사기에서는 그런 거 없이 먼저 서로 물건을 바꾸어 씹어서 아이들을 낳은 뒤,  (스사노오의 칼을 아마테라스가 씹어서 나온) 세 신이 연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스사노오는 스스로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아마테라스는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박경미의 논문 '수약녀론'(일어일문학회 42권 2호)에 근거하여 고사기의 이러한 전승을 후대의 변형으로 보고 무시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따른다면, 가장 원형이 된 이야기는 아래와 같을 것이다. 


스사노오가 누이를 만나러 다카마노하라에 올라오자 아마테라스가 제위를 걱정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스사노오와 대치한다. 스사노오는 누이가 자기를 믿지 못함을 알고 서약(우케이)로 점을 쳐보자고 제안하면서, 만약 자기가 남신을 낳으면 결백하다고 전제한다. 이에 아마테라스가 자기가 지닌 구슬을 샘물에 씻어 씹어 뱉으니 여신 셋이 나왔다.  스사노오가 자기가 지닌 십악검을 조각내어 역시 샘물에 씻고 씹어서 뱉으니 남신 다섯이 나온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다른 속셈이 없음을 인정하고 다카마노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내 생각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실제 일본신화 연구자들이 접한다면 웃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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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사회단상  |  2014. 3. 24. 23:01




나는 예전에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에 속한 '오키노시마'라는 작은 섬에 관한 포스팅을 쓴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일본서기나 고사기를 읽지 못해서 단편적으로 흩어진 정보를 모아 글을 썼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둔  일본서기 pdf 파일을 받았다.  이미 일본서기 완역본이 없지는 않으나 이렇게 번역해둔 자료를 받으니 참으로 편안하다. 


무나카타 대사는 '교통안전의 신'으로 유명한 세 여신을 받드는 곳이다.  세 여신을 모신 중심 사당은 각각 오키노시마 섬, 오시마 섬,  그리고 뭍에 있는 무나타타 본사.  이렇게 세 곳에 있으며,  각 사당에서 한 신을 모신다.  (무나카타 본사에는 부속사당에서 다른 두 신도 함께 모시지만,  본전에서는 한 신만 모셨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화를 무나카타 3 여신 관련 사항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자나기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 이자나미를 만나려고 저승에 내려갔다가,  아내의 썩어가는 모습을 보고 놀라 기겁하여 도망친다.  이에 이자나미도 성이 나서 남편을 쫓아오지만, 이자나기는 따라잡히기 전에 저승을 나와 바위로 문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부정이 탔다 하여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니 아마테라스, 쓰쿠요미, 스사노오가 태어난다.  이자나기는 세 신에게 자기네 몫으로 지배할 곳을 나누어주었지만, 스사노오는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엉엉 울며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만 말한다.  이러니 이자나기는 화가 나서 내쫓으면서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다.  스사노오는 그 전에 먼저 자기 누이 아마테라스가 보고 싶어서 천항계 다카마노하라로 올라오지만,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천상계의 지배권을 빼앗으려 하는 줄 알고 걱정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강가에서 스사노오를 맞았다.  이에 두 신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일본서기 6-0 (본문이다.)
스사노오가 누이에게 맹세[각주:1]를 하자고 주장한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가 차고 있던 십악검[각주:2]을 세 조각내었다. 그 뒤에 샘물(아마노마나위)에서 흔들어 씹어서 뱉었다. 그 입김의 안개에서 다고리히메(田心姬), 다기리히메(湍津姬),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  3 여신이 나왔다. 

아마테라스는 "십악검은 너의 것이니 그것을 근본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네 아이다."하면서 여신들을 스사노오에게 주었다. 이 여신들은 무나카타노키미들이 제사지내는 신이다. 

일본서기 6-1
아마테라스가 맹세를 하자고 주장한다. 아마테라스가 먼저 자기가 차고 있던 십악검을 깨물어 나온 아이가 오키쓰시마히메(瀛津嶋姬), 구악검을 깨물어 나온 아이가 다기리히메, 팔악검[각주:3]을 깨물어 나온 아이가 다고리히메다. 

아마테라스는 "너희 세 신은 해로의 도중으로 내려가 머물며 천손을 돕고, 천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라" 명령하였다. 

일본서기 6-2
스사노오가 하늘에 올라갈 때 '하카루타마'라는 신이 곡옥을 바쳤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의 저의를 의심하자 스사노오는 "누님을 뵙고자, 또한 곡옥을 바치고자 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테라스가 어떻게 증명하겠느냐고 묻자,  스사노오가 맹세하자고 하였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에게 자기가 찬 칼을 줄 테니 너는 곡옥을 달라고 하여 서로가 지닌 물건을 바꾸었다.  

아마테라스가 샘물 '아마노마나위'에 곡옥을 띄워, 구슬 끝을 물어 끊어 내뿜었더니 그 입김에서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市杵嶋姬命)가 나왔다. 오키쓰미야(沖宮)[각주:4]에서 있는 신이다.

구슬 중간을 물어 끊어 내뿜었더니 그 입김에서 다고리히메노미코토(田心姬命)가 나왔다. 나카쓰미야(中宮)[각주:5]에 있는 신이다. 

구슬의 꼬리를 물어 끊어서 내뿜었더니 입김에서 다기쓰히메노미코토(湍津姬命)이 생겼다. 헤쓰미야(海濱) [각주:6]에 있는 신이다. 

일본서기 6-3
아마테라스가 먼저 맹세해보라고 하면서,  만약 스사노오가 사심이 없어 남자를 낳으면 자기가 아들로 삼아 아마노하라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였다.[각주:7] 

아마테라스가 먼저 십악검을 물어서 오키쓰시마히메노미코토(瀛津嶋姬命)를 낳았다. 다른 이름은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市杵嶋姬命)다. 

구악검을 물어서 생겨난 아이가 다기쓰히메노미코토(湍津姬命)다. 

팔악검을 물어서 생겨난 아이가 다기리히메노미토코(田霧姬命)이다. 

세 여신을 우사노시마[각주:8]에 살게 했는데, 지금은 바다 북쪽 도중에 진좌돼 있다. 

오키노시마(沖ノ島)는 무나카타시 해안에서 약 60 km 떨어진, 면적이 97 헥타르쯤 되는 섬이다.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으로 이 섬의 흙 한 줌도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  이 섬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으나 10일 간격으로 뭍에 있는 무나카타 대사에서 파견하는 신관, 그리고 섬에 있는 항만 관리자 등등 사람이 있긴 있다.  악천후 등 비상사태 때 지나가던 선박이 이 섬으로 피난 올 수 있으나,  신성한 섬이라 하여 섬에 발을 밟기 전에 부정 씻기를 해야 하며,  출항할 수 있게 되는 대로 떠나야 한다. 
오미야(大)는 해안에서 약 8 km 떨어진 섬인데 약 900 명 정도 주민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라면 일본서기에서 각 신을 모신다고 설명한 내용과 현대의 무나카타 대사에서 실행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이다.  현대의 무나카타 대사가 어찌하는지는 무나카타 대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해당 부분에는 본문과 일서 셋이 있다.  이중 두 번째 일서에서만 각 신과 사당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각 사당과 제신의 이름은 이러하다. 

오키노시마         오키쓰미야(沖宮)에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
오시마                 나카쓰미야(中宮)에 다고리히메(田心姬)
무나가타 본사    헤쓰미야(海濱)에   다기쓰히메(湍津姬)

(위치상으로 오키노시마가 가장 북쪽, 오시마가 그 다음, 무나카타 본사가 가장 남쪽이다.) 

하지만 현대의 무나카타 대사에서는 이렇게 한다. 

오키노시마      오키쓰미야(沖津宮)에 다고리히메(田心姬)
오시마              나카쓰미야(中津宮)에 다기쓰히메(湍津姬)
무나카타 본사 헤쓰미야(辺津宮)에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

뭐라고 해야 할까.  각 장소에서 모시는 신을 "한 칸씩 위로 올렸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북쪽, 오키노시마에 있던 이치키시마히메를 가장 남쪽인 무나카타 본사로 남하(?)시켰다.  신명의 순서는 일본서기 본문과 똑같다.  사당 이름도 발음은 같으나 표기가 다르다.  오시마와 무나카타 본사의 사당명은 고사기와 같으나 오키노시마만은 고사기의 奥津宮와 다르다.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일본서기는 무나카타 세 여신에 대한 주석이 이 부분에서 틀렸다.  일본서기 1권 291번 주석에서 무타카타 본사의 제신이 '현재에도 다기쓰히메'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이치키시마히메다.   

그런데 적어도 기록으로만 보면 이치키시마히메가 오키노시마에 있었던 듯하다.  첫 번째, 세 번째 일서에서 맨 처음 태어난 여신이 오키쓰시마히메(瀛津嶋姬)라고 하는데,  세 번째 일서에서 부언하기를, 오키쓰시마히메의 다른 이름이 이치키시마히메라고 한다.  이름 중 오키쓰시마(瀛津嶋)라는 부분이 오키쓰미야(沖津宮)라는 사당명과 겹친다. 또한 가장 먼저 태어난 여신이 위치한 곳이 오키노시마라고 하는 점에서, 당시에도 오키노시마를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 

일본서기 본문과 일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전승인데,  본문은 가장 마지막은 아닐지라도 대체로 늦은 편에 속하는 전승이며, 또한 당시 야마토 조정의 공식 입장이다.  호족 무나카타 집안이 처음에는 오키노시마에 '이치키시마히메'가 있다고 믿었다가, 나중에 야마토 조정에게 복속되고 어쩌고 하는 와중에 신을 모신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1. 신탁, 혹은 점의 일종이다. [본문으로]
  2. 길이가 10악, 즉 약 1 m 정도인 검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구악검, 팔악검은 각각 길이가 약 90, 80 cm쯤 되는 검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4. 고사기에는 胸形之奥津宮라고 기록돼 있다. [본문으로]
  5. 고사기엔 胸形之中津宮라고 기록돼 있다. [본문으로]
  6. 고사기에는 胸形之辺津宮라고 기록돼 있다. [본문으로]
  7. 오직 이 부분에만 있는 특이한 내용이다. 또한 이 기록에서 스사노오가 낳은 남신들은 다른 부분과 달리 5위가 아니라 6위다. [본문으로]
  8. 宇佐嶋. 주석에 따르면 아무래도 오키노시마를 잘못 쓴 듯하다. [본문으로]
      역사/사회단상  |  2014. 3. 23. 01:06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추수할 것으로 가득한 커다란 밭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모든 상황과 모든 사회적 계층들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추수할 곳의 대부분은 
그곳을 경작할 이들의 부족으로 상처를 입고 있음에 대해 
항상 주목할 것입니다.

특별히, 새롭게 태어나는 세대들을 위한 곳의 망가짐으로 인해 
마음을 꿰뚫는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나는 세기에 걸쳐 계속되어온 빈곤을 향해, 
거룩하기 그지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겪는 
그 내적인 고통에  저를 일치시킬 것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오 9,38) 하신, 
거룩하기 그지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백성과 국가, 사회와 교회 
그리고 특별히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구원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화와 
인류 가족의 정신적 물질적 부를 위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 말씀보다 더 최고이며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즉, 믿음과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하여 
모든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사도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분의 거룩하신 어머니, 
천사들과 성인들, 거룩하신 분께 끊임없이 청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활기찬 성소자들, 뛰어난 영혼들, 성 사제들, 사도들을 
일으켜주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의 (생애의) 모든 날들과 저의 모든 지향을 
끊임없이 이 기도에 헌신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금밖에 인정받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명령이
어디에서든지 실행되고 알려져서, 
이 세상 안에서, 교회의 모든 고위성직자, 
교황님에 이르는 모든 성직자들, 
예수님께 봉헌한 동정녀들, 
신학생들, 거룩한 영혼들, 
어린이들과 모든 가난한 이들이, 
모든 영혼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평신도직, 사제직 안에서. 더 이상 늦지 않게, 
수많은 일꾼들과 성인 성녀들을 보내달라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아주 큰 배려와 열정을 가질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어떠한 희생도, 삶과 피를 내어주는 것까지도, 
저는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기도(Rogazione)하는 것이 
세상 가운데 널리 알려져 
보편적인 기도가 되길 바라는 까닭입니다.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차(Annibale Maria di Francia) 신부.

거룩한 열정의 딸 수녀회  성 안니발레 대축일(6월 1일)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편에서 발췌

(이 포스팅은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리지 않는다.)

예전에 이글루스 블로그에 소개한 적이 있는, 성 안니발레 신부님이 쓴 글이다. 안니발레 성인이 쓴 이 글이 나에게 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세기에 걸쳐 계속되어온 빈곤을 향해, 거룩하기 그지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겪는 그 내적인 고통에 저를 일치시킬 것이며.."

"백성과 국가, 사회와 교회, 그리고 특별히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구원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화와 인류 가족의 정신적 물질적 부를 위해..."

"성령께서 활기찬 성소자들, 뛰어난 영혼들, 성 사제들, 사도들을 일으켜주시도록.."

안니발레 성인의 요청대로 바로 이 지향, '거룩한 일꾼들을 일으켜주시도록'이라는 지향으로 기도하면서도 때때로 허무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기도가 정말로 효용이 있을까? 이것이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게 아닐까? 정말로 하느님이, 가톨릭이 가르치는 대로이신 존재가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지 않았던 바도 아니다.  아마도 죽는 그 순간까지도 확고한 답을 얻지 못할 질문이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면서 위로가 되기도 한다. 비록 극도로 보수적인 신자들은 교황님을 두고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무너트린다"라며 모욕하지만, 그와 비슷한 소리는 이미 위대한 교황 요한 23세께서도 들으셨던 적이 있다. 나는 교황님이 안니발레 성인이 쓴 글에서도 나온 '뛰어난 영혼, 성 사제, 사도'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며 지지한다. 

비록 나 자신이 '뛰어난 영혼, 사도, 거룩한 일꾼'이라고는 감히 자칭하지 못하고, 또 앞으로 될 수 있을 자신도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걸어가며 사는 것이 또한 사람이겠지. 


      잡담  |  2014. 3. 23. 00:26




자신들의 노골적인 정치적 의견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미사라는 성사를 통해' 표명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걸 왜 미사를 통해 표명하냔 말이다. 


가톨릭에 그레고리오 미사라는 관습이 있다. 전설 같은 것인데, (연옥에 들어간) 특정 사람의 영혼을 위해 30일간 연속으로 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되고 또한 영향력 있는 관습이지만 가톨릭에서 비추천된다. 미사는 특정 한 사람을 위해 전세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공동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30일간 특정 누군가를 위한 위령미사를 드림은 미사의 공동체성을 깨트린다는 이유다. 


시국 미사도 이와 같다. 그와 같은 노골적인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장으로 미사를 사용한다면 이는 미사란 성사, 종교의례의 본래의 의미가 깨지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이 그러했듯이 교회가 사회에 있어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해야 한다면 시국 미사는 충분히 공동체적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당시 엘살바도르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정의의 길>은 매우 선명했지만 또한 피로 물들었다. 무엇이 옳은지 크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느냐 잡지 않느냐 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을 뿐.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는 다르다. 더이상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 치하도 아니고, 무엇이 가장 올바르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정책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데에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한, 복잡하고 고도화된 사회지. 시국 미사 같은 것이 허용될 수 있던 시기는 실상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때에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그토록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중히 여긴다면서 어떻게 북한 주체사상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지? 주체사상이 <사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긴 한 물건이던가? 그리고 NLL 훈련이 정말로 잘못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그렇다고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지? 


하느님과 신앙이 연평도에서 죽은 주민들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고 하던가?

      역사/사회단상  |  2013. 11. 23. 22:48




성 금요일은 한국 천주교에서 부활절 전 금요일,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이 날은 미사를 거행하지 않고 대신 '주님 수난 예식'이라는 것을 한다. 이것은 미사가 아니다.  겁나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 독서 

보편지향기도(신자들의 공동 기도) 

보관 중인 성체 영하기(먹기)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성경을 읽는 부분에서는 세 부분을 읽는데, 마지막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부분을 읽되, 여러 사람이 역할을 분담한다.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맡고, 그 외에 서술을 담당하는 사람, 군중이나 빌라도의 말 등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이 뒤에 공동 기도를 들어간다. 


원래 로마 미사에서는 거의 1500년간 내가 '신자들의 공동 기도'라고 표현한 부분이 없었다. 초기에는 있었으나 6세기경쯤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동방전례에서도 사라졌다. 이 시기 공동기도 방식은 주교나 사제가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면, 신자들이 정해진 화답문구(가령 키레에 엘레이손 등)를 외치는 형식이었다. 특히 기도주제로는 예비신자들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전례개혁 때 보편지향기도를 되살리면서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주도하는 기도로 촛점을 바꾸었다. 

(추정컨데, 이 보편지향기도가 사라진 이유는 예비신자가 줄어들었고, 성찬감사기도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포함되면서 입지가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로마 미사에서 초기 공동 기도 양식을 보존하고 있던 부분이 바로 성 금요일에 하는 '주님 수난 예식' 부분이었다. 여기서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사제가 먼저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면 여전히 신자들이 화답하는 방식으로 7-8가지 주제를 청원했다. 기도 주제는 가톨릭 교회, 교황, 성직자와 수도자, 국가, 이단 소멸(___) 등이고, 거기에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도 있었다. 


이때 기도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사제가' XXX 주제로 기도합시다' 하고 서두를 떼면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일어선다. 그 뒤에 사제가 하느님, ~~~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면, 신자들이 "아멘"하고 화답한다. 


그런데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무릎을 꿇는 부분이 없이 바로 사제가 기도를 했다. 미사경본에 있는 주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예수님을 무릎 꿇게 하고 핍박했으니 여기서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기도문에서도 "하느님꼐서는 유태인들에게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건 유태인들에게 그만큼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우셔서 역시 허락하신다...하는 의미가 전재됐다. 당연히 유태인들을 낮추어보는 의미가 전제된 것이다.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 다음에는 비신자(Paganus)를 위한 기도가 있는데. 여기서는 무릎을 꿇는 부분이 있다. 유태인들은 여기서 비신자들보다도 더 낮게 잡힌 것이다.  

그래서 복자 요한 23세께서는 1962년에 트리덴티노 미사 전례서를 고치시면서 이 부분을 수정하였다. 즉 유태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무릎을 꿇게 하고, 기도문에서도 "유태인들에게도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하는 구절을 없앴다. 


그리고 1970년 전례개혁에서는 아예 성 금요일 전례 중 보편지향기도에서 무릎을 꿇는 부분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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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사/교회사  |  2013. 9. 29. 16:01




영길리 공직자가 몇 년 전에 핀란드 음식이 참 맛이 없다고 깠다는데....  내 기억 속의 핀란드 음식은 별로 나쁘지 않다. 

내가 처음으로 핀란드 땅을 밟은 것은 2008년 12월 21일이다.  12월 18일에 인천 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며칠 현지인 집에서 숙박하다가 핀란드로 갔다.  (독일에서 날 재워주셨던 분 성함이 '라인하르트'...  나중에 은영전에서 보니까 '건방진 애송이'라며 익숙한 이름이 나오더만.)  

여행일지를 날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핀란드에 도착한 날이 동짓날이기 때문이다. 그 뒤 약 3주일간 핀란드를 여행하고 1주일 정도 스위스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때 루프트한자 비생사가 특별 할인기간이라 비행기 삯을 줄일 수 있었다. 

처음 핀란드 반타 공항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투르쿠로 갔다.  투르쿠에서 날 재워줄 사람과 약속장소인 버스 대합실에서 기다리노라니 날 처음 재워주기로 한 사람과 만나 집에 들어갔다.  솔직히 그 사람 집은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참 거시기했는데,  가자마자 쓰러져 잤다.  일어나서 귀리죽인지 뭔지를 해주었다.  

그때 내 에스페란토 실력이 영 거시기했기 때문에 대화할 때 통밥으로 이해한 게 많다.   아마 귀리죽이 맞을 거다. 나중에 먹은 귀리죽이랑 맛이 똑같았으니까.  그때 놀랐던 게  


죽 위에 숟가락을 꽂으니까 숟가락이 섰다 (_____)  


처음 봤을 땐 진짜 어이가 없었다.  이게 죽이야 떡이야 하는 느낌.  죽이 하도 되어서 그릇 한쪽을 파 먹으면 연못처럼 파이는데 잘 메워지지도 않았다.  그럼 거기에 우유를 붓고 먹었다.  이게 핀란드인들 관습인지 날 재워준 사람의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인상적이었다.  

성탄절 전날 이 사람을 따라 부모님 댁에 찾아갔다.  내가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핀란드인들에게 메일을 보냈을 떄 성탄절 기간 중에는 친척들이 찾아와서 안 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사람만 날 받아들여주었다. 자기도 부모님 댁에 찾아갈 생각이니까 우리 남매(여동생도 같다)를 거기 데리고 갈 생각이었던 거다.  

투르쿠 외곽 지역에 있는 숲이 많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어머니가 마중을 나오셨다.  동네 루터파 예배당에서 같이 예배를 보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같이 성탄절 음식을 먹었다.  나는 몰랐는데 핀란드 관습이 손님이 오면 일단 손님부터 먹게 한다고 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해 놓고 자기가 먹을 만큼 퍼가도록 했다. 나랑 내 동생이 맨 처음 퍼갔는데 (위에 어른들 계신데 우리 남매가 제일 먼저 퍼가니까 뭔가 떨떠름했다.)   된장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까만 게 있었다.   설마 진짜 된장일 리는 없겠지 해서 퍼 봤더니 소고기를 잘게 갈아서 구운 거였다.  

이 된장(___)이랑 돼지 다리를 구운 게 너무 인상 깊어서 다른 음식을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른 유럽과 비슷하게 대패(?)로 다리통만 한 치즈를 대패질(?)해서 얇은 치즈조각을 빵 위에 얹고 토마토를 거기 위에 올려 먹었던 것도 기억난다.   동양에서 왔다고 아침에 중국 여행 중에 사오셨다는 중국 차를 주셨던 거도 기억나네.  


그 뒤에 여름절 휴양지로 유명하다는 쿠오피오에 갔는데, 여기서는 현지인 집에 머무르지 않고 유스호스텔에 있었다. 돈을 아끼려고 애쓰다 보니 음식을 별로 안 사먹었더니 배가 고팠다.  그런 주제 하루에 몇 시간씩 걸으니...  유스호스텔 한가운데에 있는 공용 부엌에 누군가 쪄둔 감자가 있는 걸 보고 몇 개 훔쳐(___) 먹었는데,   내가 먹어본 감자 중 가장 맛있는 감자였다. 

그 다음에는 위배스퀼래로 갔다.  여기에서 우리 남매를 재워준 분은 채식주의자였다.  파스포르타 세르보, 즉 에스페란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국제 여행용 숙박인 명부집에서도 "나 채식주의자니까 알아서 오삼"하고 적은 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배고프지?" 하면서 채식주의자식으로 요리를 했는데 동생이 날 치면서 말했다. 

"흙 냄새가 나. 이게 진짜 사람이 먹는 음식이야!" 
(쿠오피오에서 과자를 먹고 탄산수로 위에서 불리는 식으로 버텼기 때문에 하는 말.... 나중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했다. 돈이 충분히 남았거든.)  

유럽 채식주의자들이 다 이렇게 요리하는지 모르겠지만,  당근이랑 양파 같은 채소를 물이랑 함께 통에 넣고 열을 가해서 찜을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렇게만 먹으면 맛이 없으니까 바질 양념을 쳐서 먹는데,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꿀맛이었다.  난 원래 채식주의자가 먹는 음식이라면 맛없겠거니 생각했는데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우리 남내가 아주 잘 먹었기 때문에 며칠 머무르면서 점점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야채 피자라든가,  유유를 쓰지 않고 발효시켰다는 요구르트(?)라든가.  곡물 가루에 식초랑 블루베리를 섞은 음식도 있었는데, 이건 이 아저씨가 스스로 만들어본 거라고 했다.  맛?  꽤 괜찮았다.  채식주의자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음식을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맛있게 만드는 방법을 궁리한 거다.   아저씨가 장 볼 때 함께 따라가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파젤 초콜릿을 가리키며 이거 참 맛있다고, 자기는 스위스나 벨기에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가게에 유제품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특히 요구르트가 말이지.  

핀란드는 인구가 작다 보니 특정 분야를 특정 회사가 독점한 경우가 많았다. 우유는 '발리오'라는 회사가 사실상 독점했는데 우유가 달았다. 우유가 처음부터 달 리는 없겠고,  뭔가 처리를 했겠지.  동생은 핀란드 우유를 마셔보고는 "한국 우유도 이랬으면 난 어릴 때 우유를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하고 말했다.  

핀란드 중부에 있는 시골 레스티얘르비에서는 할머니가 핀란드 가정식을 제대로 해주셔서 기억이 잘 안 난다.  다양하게 잘 먹었단 기억은 확실하지만.  동생에게 할머니가 "초코 티 먹을래?" 해서 동생이 "예" (동생은 에스페란토를 못해서 영어로 이야기함)하고 대답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더란다.  그래서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하고 동생이 주방을 봤더니 할머니가 초콜릿 덩어리를 불에 녹이고 계셨더라나 (____)  

타는 쓰레기를 오븐 안에 넣어서 그 불로 요리를 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서 사우나를 했는데,  사우나 불도 장작을 태워서 했다.  할머니는 사우나를 하면 힘이 빠진다면서 미리 음식을 만들어놓고,  사우나를 하면 그걸 먹도록 했다.  그때 무슨 빵을 해주셨는데  정확히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나랑 내 동생은 그걸 카렐리안 빵이라고 부르는데,  카렐리아 지방에서 먹는 거라나?  빵이 길죽한데 가운데에 죽(?) 같은 게 들어가 있고 주변은 울퉁불퉁했다.  영어로 카렐리안 파이라고 한다나, 아마 맞을 거다.  

버터를 녹여서 자주 쓰셨던 기억이 난다.  마요네즈 같은 건 할머니는 취급하지 않는다나.  할머니 어리셨을 때 바나나라는 걸 구경한 적이 없어서 (대학교 떄문에 헬싱키에 와서야 처음 바나나를 봤다고 한다.) 지금도 별로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 우리 남매를 부르시더니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소시지를 구워먹었는데 어이쿠, 그 맛이야 말할 게 있을까!  

할머니가 여름철에 블루베리를 따서 만들었다는 잼을 빵에 발라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잼 맛이 좋았다.  


뭐.... 배가 고파서 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영길리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핀란드 음식이 그 악명 자자한 영국보다 더 맛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할머니께도 이야기를 들었는데,  할머니 어리셨을 때만 해도 겨울철이면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했다. ^^;;  겨울이 길고 농사가 잘 안 되는 지역이니 겨울이 되면  밤이 너무 길기 때문에 어른들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래서 온가족이 주로 집에, 특히 난로 앞에(_____) 앉았다고 했다.  그때 뭘 드셨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셨지만,  농사 안 되는 겨울에 먹을 건 주로 보존식이었겠지......  
      잡담  |  2013. 9. 7. 22:03




유럽인인지 미국인인지 법의학자가 쓴 책에 나온 이야기다. 저자도 덕국 법의학자가 낸 사례 리뷰 논문에서 본 이야기라고 한다. 


덕국에서 어떤 양반이 포크레인인지 아무튼 중장비를 놓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자기가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자기 목이랑 포크레인(?) 손이랑 줄로 묶어서 정신줄이 간당간당해지기 직전까지 몰아놓으면 무슨 성적 쾌감이 온다나? 이거 비슷하게 자발적으로 질식자위(?)를 하다가 간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이 양반도 그렇게 했단다. 너무나 마음에 들다 못해 사랑의 감정이 샘솟았는지 자기에게 쾌락을 안겨준 그 장비 한쪽 구석에다가 사랑(?)의 시까지 한 수 적어 놓았다는데, 사랑이 너무 지긋했는지 아예 정신줄을 놔버려서 그대로 질식사해버렸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쓰면서 "그 사람이 적어놓았다는 사랑의 시를 그 논문 저자가 한 줄도 인용하지 않음이 심히 안타깝다." 하고 적었는데 나도 안타깝다. 도대체 뭐라고 적어놓았을지 궁금한데.

      잡담  |  2013. 9. 2. 21:33




예전에 실험실에 있을 때 내가 몇 안 되는 종교인이었다.  그래서 종종 선배랑 술 마실 때 종교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사도들이나 몇몇 성인들이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는 말을 믿는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하시고, 또한 가톨릭이 그분이 친히 세운 유일한 종교라면  기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겠나?  하지만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은 매우 다르다. 


웹 서핑 등을 할 때 나는 툭하면 귀신 타령하는 말에 화를 내는 경우가 잦다.  일단 정신과에 보내야 마땅할 사람에게 정신과를 안 보내고 무슨 도사님, 법사님 타령부터 하기 때문이다.  설령 천주교 신부님에게 보낸다고 해도 화를 냈을 거다. 먼저 정신과 의사에게 보이고, 믿고, 차분히 따라주어야 하는데 다짜고짜 종교적인 것을 권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제일 짜증나는 부류는 '의학적인 진료를 전혀 무시하지는 않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시하는 쪽이다. 무게중심을 겁나 종교적인 데에 둔다. 정신과 치료는 특히나 환자가 의사를 믿고 따라야 하는데,  이런 따위 놈들 말을 들으면 환자가 의사를 제대로 신뢰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딴 말에 귀를 기울이는 환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잡담  |  2013. 8. 16. 01:24





인터넷에서 찾은, 레스티얘르비 호수 여름철 사진


5년 전에 여동생이랑 같이 핀란드에 여행 갔을 때, 레스티얘르비(Lestijärvi)라는 호수 마을에서 며칠 머무른 적이 있다.  핀란드어로 얘르비(Järvi)라고 하면 호수란 뜻이라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핀란드어에는 a와 ä로 표시되는 모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인 귀에는 그냥 '아'라는 거다.  핀란드인들에게 발음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ä는 '애'라고 말은 해주는데 핀란드인들이 실제로 말하는 중에 들어보면 그냥 '아'로 들린다.  나랑 내 동생이 핀란드어 지명을 읽을 땐 편의상 ä는 '애'라,  y는 '위'라 간주하고 장모음은 전부 단모음으로 간주했다.  한국인이 발음하기 편하게 바꿔버린 거지만,  이 정도만 해도 현지인들에게 '나 어디로 간다' 같은 이야기를 할 땐 다들 알아들었으니까.   나중에 알고 지내는 언덕에게 들으니,  핀란드어를 배우는 소수의 (한국인도, 핀란드인도 아닌) 언덕들 사이에서도 a와 ä 구분은 지랄 같기로 유명한단다. ^^;;; 

위배스퀼래(Jyväskylä), 그래,  이 지명도 한국인이 읽기 지랄 같다.  핀란드어 표기에서 J는 다른 유럽어의 로마자 표기 용례와 마찬가지로 반모음 /j/인데,  내 혓바닥 감각으로는 j와 y과 합쳐지면 뭐라고 발음해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위?  유이? 고민을 포기하고 그냥 위배스퀼래라고 읽고 있다.  아무튼 1월 4일쯤에 위배스퀼래市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레스티얘르비로 갔다.  위배스퀼래 버스 터미널에서 표 사려고 줄을 서니까 창구 여직원이 우릴 보고 긴장했다는 티가 팍팍 났다.    뭐랄까... "아이씨...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대화할 수 있을까?" 하는 듯한 느낌으로.   하지만 표를 끊는데 무슨 심오한 대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서로의 어설픈 영어로도 충분히 이야기가 됐다.  표 삯을 결재하느라 신분증이 필요하다기에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더니 잠시 멍하니 있다가 여직원이 물어보았다.  이거 생년월일 표시가 뭐냐고.    그래서 주민등록증 앞자리 숫자를 가리켰다. ^^;;    

버스는 오전 11시 출발 예정이었다. 핀란드의 국민 초콜릿이라는 빠쪨 초콜릿이 성탄절 대목이 지났다고 떨이로 팔기에 한 통 샀다. 위배스퀼래에서 우릴 재워주었던 핀란드인 채식주의자 아저씨가 빠쪨이 참 맛이 좋다고 칭찬을 자자하게 해둔 터라 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몸도 당분이 그리웠고. 미리 버스에 타면서 기사에게 물었다.

"레스티얘르비?"
"예스"

의미를 풀면....


"우리 레스티얘르비 가니까 신경 좀 써 주셈..."
"알았어"

기사가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뚜,  뚜, 뚜, 뚜우우우우우    부릉부릉
동생이 중얼거렸다.

"11시에 칼출발이네." 


버스가 가는 동안 도로에 차가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버스가 칼출발, 칼도착을 할 수 있었다. 래스티얘르비 정류장에 도착하니까 버스 기사가 우리에게 눈짓을 하더니 내려서 짐칸을 열어주었다.  나랑 동생도 따라 내려서 짐을 챙기는데,  레스티얘르비에서 우릴 재워주시기로 한 할머니가 뒤에 와서 인사를 했다.  우릴 알아보긴 아주 쉬웠다. 관광지도 아닌 곳까지 들어온 유색인종이 흔한 건 아니니까. 

 레스티얘르비는 북위 63도 30분에 있다.  태양의 위치랑 시간감각이 영 맞질 않았다.  태양의 위치를 보면 오전 8시쯤인 것 같은데 정오다.  당연히 낮은 짧다.  내가 갔을 때 낮이 하루에 5시간쯤인가 그랬으니. 

내가 핀란드에서 딱 동짓날 도착해서 3주간 돌아다녔다.  이때 겨울밤이 너무 길어서 작년에 여행갈 때는 프랑스-스웨덴에 하지 무렵에 갔는데,  하지든 동지든,  낮이 너무 길든 밤이 너무 길든 몸 생채시간이랑 안 맞으면 힘들긴 매한가지임을 깨달았다. 

우리 남매를 재워주기로 한 노부부는 점잖은 중산층 가정이었다.  할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뒤 통역사로 일하셨다고 했고 할머니는 교편을 잡았던 분이었다.  나중에 나랑 내 동생이 이야기했다. 

"한국인이나 핀란드인이나 교사들은 말하는 어투가 다 똑같은가 봐." 

도착한 첫날 할아버지가 나와 내 동생을 앞에 두고 일본어로 막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이 할아버지, 일본어도 하시는가 싶어서 입을 딱 벌리니까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일본어를 배운 적은 없는데 부부끼리 일본에 여행 갔을 때 음식점에서 일본인 종업원이 하는 소리를 듣고 그거 따라한 거라고 했다.  그걸 한 번 듣고 아직까지 외우고 있단 밀이야?  하고 놀랐다.   어조와 발음까지 상당히 정확하게 따라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귀로는 구분이 안 될 만큼.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물었다. 
"이 겨울에 핀란드에 뭐 볼 거 있다고 왔니? 밤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데."  
"눈이랑 밤 보러 왔죠."  
할아버지가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동생이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북유럽에도 겨울에 한 번은 가봐도 좋을 것 같아. 그때가 아니면 못 보는 게 있으니까.... 한 번만."

레스티얘르비 호수는 수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호수였다.  할아버지가 여기 둘레가 대략 15 km쯤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호수 안쪽에 작은 섬이 있는데 동네 주민들이 여름에 사용하는 별장들이 보였다. 섬뿐만 아니라 호수 둘레에도 별장이나 사우나장이 있는데,  여름이면 주민들이 사우나를 하다가 호수 물에 뛰어들어서 몸을 식히고 또  사우나장에 들어가고 한다나.    

예전에 이 댁에 어느 케냐 여자가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살면서 '큰물'이라는 걸 본 적이 없던 터라 호수를 보자 옷을 벗고는 들어가서,  수영도 아니고 그냥 얕은 물에서 꿈뜰거리면서 "나 지금 수영하고 있어요!" 라고 하더라나. ^^;;   내가 갔을 땐 한겨울이라 호수가 꽝꽝 얼어 있었기 때문에 수영은 하지 못했다.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8시쯤에 일어났지만 밖은 새벽 3-4시인 것처럼 깜깜했다.  할머니는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식탁에 촛불만 켜 놓고 같이 밥을 먹었다. 할머니 말이 당신은 촛불을 워낙 좋아해서 이렇게 종종 켜놓지만,  할아버지가 그러다 불 난다고 싫어하기 때문에 젊었을 때에는 그걸로 많이도 싸웠다고 한다. ^^;;   실제로 핀란드에 머무는 동안 초나 촛대 장식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밤중에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 문간에 작은 초를 켜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불을 켜두냐고 물어보니까 핀란드 풍습인데,  겨울에 빛이 돌아오길 바라는 거라나.  가로등이 거의 없는 곳에서 집집마다 문간에 촛불을 켜둔 모습은 꽤 보기 좋았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실제로 초를  붙여 놓았음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알았다.  핀란드어로 크리스마드를 요울루라고 부르고,  여기 전통에도 산타클로스 비슷한 정령(?) 할아버지 같은 게 있다고 했다.  할머니 말로는 염소 할아버지라고 하던가 그런데, 수염을 염소처럼 길렀다고 그렇게 설명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 말이 예전에는 집안의 노인이나 마을 어른이 크리스마스 무렵에 이 염소 할배로 분장하고 기습적으로 애들 모인 곳으로 들어가서,  "나쁜 애들이 누구냐!  벌을 주마, 벌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내가 기분 좋도록 노래를 불러라!"라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고, 애들은 놀래서 진짜로 노래를 불렀다나. ^^;;    다만 요새는 미국식 산타클로스의 영향을 받아서 예전과 달리 빨간 옷을 입고 점점 산타클로스 비슷하게 변해간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가지에 양초를 붙여놓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 외에 집안에 도깨비(?)가 있다고 믿어서 어머니들이 음식을 조금 남겨두고, 특히 사우나실 앞에 도깨비를 위한 작은 공물을 남겨두기도 했단 이야기도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지금은 이런 나이든 분들이나 기억하는 오래된 풍습인 것 같지만.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성주신, 조왕신,  용단지 같은 우리네 가택신앙을 연상했다. 

할머니 말씀이 당신이 어릴 때만 해도 핀란드는 꽤 살기 척박한 나라라 하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싶다.  겨울이면 밤도 길어서 밖에서 일도 못하고 집안 벽난로 근처에서만 있었다나.  일주일에 한번 온가족이 사우나를 했는데,  어머니들은 가족들이 사우나를 하면 온 가족의 옷을 번개같이 빨아서 사우나실 안에서 말렸다고 한다.  내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가 정확하다면,  이 동네 예배당 옆에 있는 비석은 이 동네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아사한 사람들 명단을 적은 거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동네 호수로 나갔다.  호수가 꽝꽝 얼어붙었기 때문에 호수 위를 '걸어서' 산책하고 돌아왔다.  바람이 휭휠 불어서 완전 중무장을 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할머니는 호수에서 강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쪽은 얼음이 얇아서 사람이 올라서면 깨질 수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호수 위를 돌아다니다가 어디를 밟았는데 (얼음 위에 쌓인) 눈이 물에 젖는 게 보이거든 천천히 뒤로 물러서라고 알려주었다. 풍덩 빠지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다리 한짝만이라도 물에 젖으면 이런 추위에서는 동상에 걸리므로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애들이 호숫가 한켠에서 아이스 하키를 하고 있었고,  어느 동네 아저씨는 호수 위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다.  

레스티얘르비 호수 위에서.  이거 찍은 시간이 낮 11시 30분이다.


같은 시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여동생이 호수 위에서 눈을 밟고 지나간 흔적. 


같은 시간,  호수 위 약간 다른 곳에서. 동네 아저씨가 지나간 흔적이 눈 위에 남았다.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가 하는 음식에서 버터 냄새가 물씬 났다.  할머니가 손님들이라고 더 잘 해주셨던 것 같다.  나중에 할아버지께 들으니 예전에 어느 일본인 노부부가 손님으로 온 적이 있는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일본 음식을 찾는 바람에 곤욕스러웠단다.  그에 비하면 우리 남매는 주는 대로 다 잘 먹으니 아주 좋은 손님들이라고 하였다. ^^;;  

동네를 돌아다니면 동네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앞에서 수다 떠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나랑 내 동생이 지나가면 애들이 전부 입을 다물고 뻔히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헬싱키에서는 유색인종이 꽤 흔해서인지 별로 이런 모습이 없었지만,  좀 외진 곳으로 나가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기차에서는 어떤 아기가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막 하니까,  아기 아빠가 아기 손가락을 꾸욱 오므리게 한 다음 기찻간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우리들이 불쾌해할까 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뭐,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였으니까 크게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밤중에 할머니 부부가 동네 친구분을 만나러 가는데 우리도 따라오겠냐고 물었다.  따라갔다.  우리 남매가 입은 잠바 팔에 뭔가 반짝이는 것을 달아주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밤중에 도로변을 걷다가 차에 치일 수도 있기 때문에,  차 불빛을 받으면 멀리서도 반짝여서 사람 있다고 알려주는 거라고 하였다. 그렇게 동네 친구분 댁에 갔는데,  이분은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은 헬싱키에 나가 있어서 당신 혼자 사는 분이었다.  그래서 집도 아주 조그마했다. 할머니 혼자 살아야 하니까.    그 할머니는 당신 젊었을 때 사진, 결혼했을 때 사진 같은 것을 보여주었는데 전부 흑백이었다.  옷도 딱 봐도 옛날 식이고.   

이 동네 할머니가 내 머리를 만지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할머니가 번역해주시길,  "염색도 안 했는데 검은 머리가 나온다는 게 신기해"였다나. ^^;;;  나도 속으로 '염색도 안 했는데 검은 머리 아닌 머리가 나온다는 것도 신기해요'라고 중얼거렸다. 

일요일에 할머니가 루터파 예배 보러 가시는 길에 나도 예배당에 따라갔다.  할마니 말이 여기 목사님이 아이를 여덟 명인가 나았다고 하기에 내가 입을 쩍 하고 벌렸더니,  그건 핀란드인 기준으로도 흔히 않으니 그게 보통이라고 생각하진 말라고 그랬다. ^^;;  하얀 나무로 된 예배당이었는데 2층에 작은 오르간이 있었다.  오르간에 라틴어로 Deo soli gloria(하느님 홀로 영광)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물론 거기 모인 사람 중 유색인종은 나 혼자. 그래서 할마니랑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할머니가 핀란드어로 설명하는 이야기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꼬레아" 단 한 마디밖에 없었다. ^^;;; 

나중에 호수 위에서 썰매를 탔는데,  동생의 소감이 재미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자연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어."
막 달려서 속도를 붙이면 썰매 위에 올라타서 쭈욱 미끄러지는데,  눈발은 날리고 호수에 있는 섬은 가까워지고 수평선은 저 멀리 있는 걸 보면 사람이 작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섭다고 그랬다.  핀란드는 자연 자체도 아기자기하다기보다는 넓다, 거칠단 느낌이 강해서 더 그런 것 같다.

      카테고리 없음  |  2013. 8. 16. 00:56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일본군은 사실 매우 뛰어난 군대였다. 1933년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 군대와는 달리 일본군 병사 개개인부터가 군인이라는 사실에 지극히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군인정신을 실천하려 애썼다. 일상생활에서도 군인정신을 실천하는 그 기개와 고결함!  필히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니리.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사건 때부터 일본군이 얼마나 연전연승,  상승(常勝)군대가 될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은 민관군이 서로 협력하니 마치 왕망이 신을 다스림과 같았다. 


일본군은 실로 엄부자모와 같은 군대였다. 지휘관은 엄부요 부사관은 자모이니, 지휘관의 명령이 곧 천황의 명령인 줄로 알고 받들었다. 그 기강이 추상과 같아 매번 감사를 하여도 서류와 다른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고, 부분적으로 패전을 한다 하여도 단 한 명도 포로가 없었다.  설령 포로로 잡힌다 하더라도 기꺼이 할복하니 어찌 미군이 살아남은 포로의 입에서 기밀정보를 접할 수 있으랴?   병사들은 매번 메이지 천황이 내린 군인칙어를 낭송했는데 과연 칙어에서 가르친 군인상과 같았다. 또한 육해군 협력이 잘 되어 서로 공을 다투지 않고 매번 서로를 추어올리니,  상앙이 진을 돌볼 때에도 이처럼 기강이 서릿발 같지 않았고,  주문왕이 주를 다스릴 때에도 서로를 아낌이 이렇지 않았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모두가 용맹하여 감히 '후퇴'라든가 '패배'라든가 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오직 '진격'  '돌격'  '승리'란 말을 입에 담았을 뿐이다.  미국 군인들은 일본인보다 기골이 장대하다 하나 정신력이 약하여 매번 후퇴니 작전이니 하는 말을 해대니,  일본군에 맞서 총칼에 찢긴 어육이 되었을 뿐이다.   일본군 병사들과 지휘관이 혼연일체가 되니 위나라 오기를 위하여 병사들이 몸을 바쳤다 한들 이와 같으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력적으로 우월한 미군을 상대로 얼마나 통쾌한 일격을 양인들의 오만한 콧대에 날렸던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은 지략이 깊고 용맹하여 조괄이 진과 맞섬과 같았다.  그 이름은 일본사에 길이 빛나 천추에 남았으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다. 조괄은 단 한 번 실패로 안타깝게 전사하였으나,  무타구치 장군은 오래도록 일본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웠으니 기실은 조괄보다 낫다 하겠다.  특히 임팔 작전은 무타구치 장군의 자랑이라 할 만한 업적으로,  비록 적장이라 하나 두고 두고 칭송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일본의 명재상,  도조 히데키 총리를 추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도조 총리는 험난한 때에 군주에게 충성함은 범려라 하여도 이와 같지 않으며, 형국을 조망하여 국운을 개척하는 데에는 제갈량이 온다 하여도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 가사도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 조국이 위태할 때 군권까지 장악하여 좀스러운 자들이 감히 국사에 관여치 못하게 하였고,  시의적절한 때에 진주만을 공격하니,  아둔한 미국인들마저 일본이란 이름을 들으면 오금을 저렸다. 대본영을 이끌어 전쟁을 지휘함에 있어 지혜와 통찰력이 심원하니 손무가 살아온다 해도 이같지 않을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이러한 저력이 빛을 발하니 일본 해군은 전설이 될 만한 공격력과 전술로 용맹하게 달려들어 미 해군을 궤멸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해저로 가라앉았던 항공모함을 인양해서 진격하는' 듯이 진격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도조 총리는 전진훈에서 군인들이 패배하더라도 결코 포로가 되지 말고 할복하기를 명하였다.  일본이 핵을 두 번이나 맞은 뒤 시세가 기울어 항복할 때에도 도조 총리는 정치인이자 또한 군인으로서 용맹스러이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도조 총리와 같은 사람이 자살에 실패하여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함은 언어도단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뛰어난 군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배한 것은 오직 미국이 자금력과 기술력으로 핵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독일측 과학자들이 돕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허나 적어도 재래전력으로서 일본은 정신력이야말로 야마토 남아의 힘임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대한의 군대도 비록 원수라 하나 이러한 일본군의 전례를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 본 포스팅은 중국사와 일본 근대사를 알아야 웃을 수 있도록 최적화되었습니다. 
* 왕망, 조괄, 가사도:  전부 자기 나라를 망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중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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