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해당되는 글 28건

Mi pensas ke drako-regxo de Han-gang rivero estas la plej ricxa el cxiuj tradiciaj dioj.  Aliaj ne povas akcepti iun de homoj pro tio ke Kristianoj aux ateistoj estas pli multigxinta ol ili estis. Sed  la drako-regxo estas malsama kun ili. Almenaux kvin homoj sakraficias sin po unu tago al li, speciale sur Mapo-granda-ponto, cxu ne? Neniu povas paroli  "li ne estas beata". 

      역사/사회단상  |  2013. 8. 3. 01:11




예전에 심심파적 삼아 무작위로 받아둔 논문을 하나 읽어봤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애즈베리가 가지고 있던 '경건'에 대한 개념과 초점은 웨슬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애즈베리는 '성례'와 '고정된 기도'에 경건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설교'와 '훈련된 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초기 미 감리교회에서의 성만찬의 거행은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히크만은 미국의 일요일 예배에서 성만찬이 포기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자세한 상황과 이유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미국 감리교의 초기에는 성만찬을 집례 할 안수 받은 장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미국 감리교회 초기의 회중들은 안수 받은 장로가 주관하는 하는(일년에 서너 번) 집회에서만 성찬의 신비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의 다른 개신 교단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에 대한 경향 때문이었다. 그 당시 다른 개신교단에서도 성만찬의 거행은 빈번하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리교도들은 그 당시 다른 개신 교단들이 가지고 있던 성만찬 이해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감하였다고 한다. 보편적으로 이해되었던 성만찬에 대한 인식은 성만찬이 신적인 것의 '대리'적이 상징일 뿐인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로써의 설교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세 번쨰로 우리가 보게 되는 그 당시 성만찬의 한계는 선교지인 미국에서의 감리교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고정된 본문을 읽는 형태의 성만찬의 예식은 그 당시 구두(口頭) 문화에 익숙한 미 감리교인들에게 어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설교 중심의 예배와의 조화에 있어서도 삐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네 번째로는 성만찬에 대한 부담스러운 회개의 조항들 때문이었다고 히크만은 지적한다. 특히 이러한 조항들은 성만찬을 가치 없게 받을 떄에 대한 경고와 결합했는데, 이러한 조항들은 미 개척시대의 감리교인들이 성만찬을 매주 받기에는 부담스럽게 작용했다. 오히려 그들은 일 년에 드물게 거행되는 성만찬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하는데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찬이 가지고 있던 참회의 성격이 점차 강하게 나타남으로 인해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의미를 강조했던 웨슬리 전통은 미 감리교회서 사라져 갔다.


전창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연합감리교회 예배의 변화: '성찬 감사 기도'를 중심으로", <<신학과 실천>> 27 (2011년): 55-84.
(인용문에서 오타는 원문 그대로.)



한국 개신교에서 성만찬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미국 선교사들 영향이겠군. 그런데 편집부 누구냐.  아무도 안 읽어봤나. 오타가 곳곳에서 나오네.  그리고 난 왜 이런 걸 심심파적으로 읽는 거지.





'전례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금요일 예식, 반유대주의  (0) 2013.09.29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0) 2013.07.19
예수님의 고통  (0) 2013.07.19
그런저런 이야기  (0) 2013.06.30
아나포라 제4 양식  (0) 2013.06.30
      전례사/교회사  |  2013. 7. 26. 21:04




2007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혔다.  나는 한국 개신교계의 순교 담론 자체가 이상하고,  선교 담론은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보면 관람객들이 지나가는 통로 거울 밑에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일부러 순교자가 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문뜩 아래 글이 생각났다. 


"최근에 프리기아 지방에서 온 프리기아 출신의 퀸투스라는 사람이 맹수들을 보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자발적으로 순교하도록 부추긴 사람이었습니다. 전집정관은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기원제물을 바치도록 온갖 회유의 말로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스스로 (순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이와 같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부문헌총서 12,  "폴리카르푸스의 편지와 순교록" 중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번역을 인용. 원문은 서기 160년경쯤에 씐 것으로 추정됨.) 


선교를 하다 보면 순교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순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수가 좋은 학문활동을 함이 목적이어야지, SCI급 논문지에 실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듯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활동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아니,  "어둠만" 보여준 사례라고 정정하자. 


아프가니스탄 사건 관련으로 무슨 말이 있었나 글을 찾아보았다. 


홍기영, "2007년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 <<선교신학>> 19 (2008년): 159-188.


글쓴이는 나사렛 대학교 선교학 교수라 하였다.  상기 글에 대한 내 평가는 이거다. 


조선중앙통신 or 대본영 발표


실패도 아주 대실패한 사례를 소재로 하면서도 털끝만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어두운 부분을 철저하게 검열하여 썼다.  그래서 내가 조선중앙통신이거나 대본영 발표라고 하는 거다.  



"2007년 7월 19일은 한국교회가 잊지 못할 날이다. 분당에 소재한 샘물교회에서 파송한 단기선교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피랍된 날이다. 이날 우리 한국교회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당황하였으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국민들은 제발 무사히 모든 피랍된 선교단원들이 풀려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하였다."


"특히 타문화권 선교(cross-cultural missions)는 고되고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도 선교적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은 이 축복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수도 있다(계 2:5).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선교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1980년대 말 이래 경험하고 있는 침체 또는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하고 더욱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결코 하나님의 선교를 막을 수 없으며 앞으로 어떤 유사한 사태도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편협하고 독선적인 자세로 선교하는 것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선교형태를 또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샘물교회는 평화봉사단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다.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민족의 평화와 복지와 건강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간 것이다."


"샘물교회 담임목사는 “여러분이 볼모로 잡고 있는 그들은 여러분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저를 볼모로 잡을지언정 그들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한국교회도 그와 함께 기도해야 했다. 우리는 샘물교회를 위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샘물교회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했다. 오히려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곳에 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 것이 아닌가?"


"샘물교회에서 파송한 선교단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선교형태가 아니라 현지인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부터 시작하는 청취자 중심(audience-oriented)의 의료복지선교를 수행했다."


글쓴이가 철저히 검열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를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음이 은연 중에 드러나는 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샘물교회를 위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샘물교회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했다."



글쓴이가 말하는 '우리'란 개신교계다.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지"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전재한다.  이 글은 제목은 분석인 것처럼 썼으나 실상 분석이 아니다. 글쓴이에 따르면 샘물교회 선교단은 단 한 치의 잘못도 없었다.  아니,  실상 선교단마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만약 이 글을 본다면,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개신교에 대한 원성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차라리 연설문에 가깝다.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쳐 나가야 한다. 이런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다. 


글쓴이는 3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래서 나는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을 인용한 것이다. 



최우영,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 반개신교 담론의 기원과 해석", <<사회와 이론>> 14 (2009년): 313-351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최우영 교수가 쓴 위 논문은 조선중앙통신 같은 홍교수의 글과는 달리, 대놓고 그 어둠을 파헤치려고 한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2007년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반개신교 담론이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 종교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반개신교 담론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집합적인 양상으로, 그것도 매우 흥분된 형태로 분출되었다. 과거 정치권력에 의해 특정 종교가 비호나 박해를 받음으로써 여기에 대한 시시비비가 논의된 적은 있었지만(강인철, 2003; 박희승, 1995),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특정종교를 둘러싸고 긴장과 갈등이 이 정도로 불거져 나왔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표출된 반응은 개신교에 대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그래.  이 글이 오히려 상황을 직시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1년 전에 전초전이라 할 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2006년 3월, 인터콥 대표 최바울 목사가 8월 초에 아프가니스탄에 2천 명을 보내 평화축제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외교부도 바보가 아닌지라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2천 명을 보내겠다는 이 대담무쌍한 계획에 대경실색했다. 심지어 한기총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올 정도였지만,  최바울 목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1주일 예정이던 것을 3일 일정으로 줄이고,  7월 30일에 시작하려던 것을 8월 5일로 늦추었을 뿐이다.  아프간 정부도 "한국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통보했고,  이맘 500여 명이 모여 "한국인들이 선교하러 왔다" 하며 항의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만약 일정대로 진행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에 최바울 목사는 이 모든 소식에 대해 "사실무근이다.  한국 정부가 아프간 정부를 압박해서 있지도 않은 소식을 뿌린다" 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국 이미 입국했던 사람들이 추방되고 나서도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약간 이야기는 다른데,  2005년 통계청의 종교인구통계가 발표됐을 때에도 개신교계에서 작은 파란이 있었다. 개신교인 인구가 천만이 못될 뿐만 아니라,  그 전과 비교해서 오히려 숫자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때 몇몇 사람들은 "통계청이 자료를 조작한 줄 알았는데, 따로 알아보니 맞는 것 같더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통계청이 개신교인 인구수를 조작해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외교부가 (아무 문제 없는) 아프간 선교를 방해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최바울 목사가 이끄는 인터콥은 심지어 다른 개신교 선교단체와도 갈등이 많아서 결국 다른 단체들이 협력관계를 끊을 정도긴 했지만, 당시에 최바울 목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많았음은, 그리고 아마 지금도 꽤나 있음은 확실할 것이다. 

'역사/사회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받아야 할 군대, 일본군  (0) 2013.08.16
Babilido  (0) 2013.08.03
한국어판 알레이스터 크롤리 전기  (0) 2013.07.02
신의 섬, 오키노시마 이야기  (1) 2013.06.30
태평광기를 읽다가 크게 웃었다.  (0) 2013.06.30
      역사/사회단상  |  2013. 7. 25. 21:47




사직단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참 재미나단 생각이 든다.  고려에도 사직단이 있었는데 고려 사직단은 천자국 예법에 따라 사직단 각 단 길이를 5장으로 했다. 그런데 고려는 중국의 옛 예법을 엄밀히 따르지는 않았다. 중국 예법에 따르면 사직단 신위는 북향해야 하는데, 고려에서는  남향하도록 했다.  조선은 경복궁을 지은 뒤 종묘와 사직을  종묘를 만들었다. 종묘를  세움은 대작업이라 실록에 기록이 세세하게 남았지만 사직을 만듦은 별로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 실록에도 기록이 변변찮다.  (종묘와 사직단을 모두 가 보면, 사직을 세움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가슴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직은 대단히 중요했다. 흔히들 종묘사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종묘보다 사직이 위다. 국상을 맞아 종묘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건만 사직에는 제사를 지낼 정도니 말이다.  종묘는 왕가 일원이 결속하는 자리지만, 사직은 왕을 중심으로 만백성이 결속하는 자리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빌어 풍요를 기원하는 곳이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면,  사직단이야말로 농사의 성지로 땅의 중심이다.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을 세웠다.  좌묘우사인데 왜 종묘가 동쪽,  사직이 서쪽인가? 옛 예법에는 군주를 북신, 즉 북극성에 비견하여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를 기준으로 좌우를 따지기 때문에 남향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진다.  경복궁에서 남향함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지니까 당연히 좌측이 동쪽, 우측이 서쪽이다. 



사직단 주변에 두 겹으로 담을 둘러쌓는데,  이 담을 유(壝)라고 부른다.  바깥쪽 유에는 동서남북으로 홍살문이 하나씩 있다. 유를 넘어서 들어가면 제단이 두 개가 있는데, 동쪽이 社단, 서쪽이 稷단이다. 사직단 내에서 방위를 정할 때는 실제 방위를 따지지 않는다.  사직단이 경복궁 서쪽에 있으므로, 사직단을 기준으로는 경복궁이 동쪽에 있다.  그러므로 경복궁을 향한 동쪽을 <의례상> 북쪽이라고 하고 방위를 정한다. 사단이 동쪽, 직단이 서쪽이라는 말도 경복궁쪽을 기준으로 삼아 한 말이므로, 실제방위를 따지면 사단이 남쪽, 직단이 북쪽이다. 이 글에서도 실제방위가 아닌 의례상 방위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설명한다. 



바깥쪽 유와 안쪽 유에는 모두 홍살문이 있다. (그러니까 모두 8개) 실제로 사직단에 가면 북쪽 홍살문이 정문인 줄 알기 쉽다.  홍살문 단이 3단이라 넓직해서 그렇다.  하지만 실제 정문은 서쪽 홍살문이다. 북쪽 홍살문은 신이 오는 방향이라 하여 3단으로 넓직하게 만들었을 뿐, 출입하기는 서쪽 홍살문으로 했기 때문이다. 북쪽 홍살문에서 서쪽 홍살문까지 네모난 돌을 깔아 길을 만들었는데, 유와 유 사이 공간만 지난다. 북쪽 홍살문과 사직단 가까운 곳에 돌을 도드라지게 쌓아 판위를 만들었다. 판위란 제사 때 왕이 서는 곳이다. 



바깥쪽 유의 북쪽에 있는 홍살문.  3단이다.



북쪽 홍살문 두 개를 비교한 것.

안쪽 유에 있는 홍살문은 1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문 사이에 있는, 왕이 서는 자리인 판위가 보인다.


조선의 예법으로는 사직단에 정월 신일申日에 기곡제祈穀祭를, 음력 2월과 8월 상순 무일戊日에 중삭제仲朔祭를, 납일臘日에 납향을 지냈다. 나라에 흉한 일이나 길한 일이 생겼을 때에도 이를 고하고자 제사를 지냈다.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납일은 동지 이후 3번째 무일을 뜻하는데 이는 조선 기준이다. 중국에서는 중삭도 2월과 8월 상순 술일戌日에 지냈고, 납일 또한 동지 후 세 번째 술일이었다. 납일에는 짐승을 사냥하여 바쳤다고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납일에 눈이 내리면 이를 녹여 납설수臘雪水라 부르며 약에 쓴다고 한다. 




유에 둘러쌓인 사직단.  유가 둘임을 알 수 있다.



사직과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다른 제수와 함께 대뢰大牢를 바친다. 대뢰란 소, 양, 돼지를 제수로 함을 뜻한다.  소뢰小牢는 양과 돼지를 말한다. 대뢰를 바침은 천자국의 예법이요, 소뢰를 바침은 제후국의 예법이라는데  조선은 기꺼이 대뢰를 바쳤다. 원래는 종묘에만 대뢰를 바쳤다는데, 사직은 소뢰를 바치면서 종묘에는 대뢰를 바침은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사직에도 대뢰를 바치기로 예법을 바꾸었다. 대한제국 이전까지 조선의 예법은 제후국과 천자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고려 때에는 사직단이 5장이고 사직단의 신위도 태사太社, 태직太稷이었는데 이는 천자국 예이다. 조선은 제후국 예를 따라 사직단은 2장 5척으로 하고 신위도 국사國社, 국직國稷으로 했다. 그러면서도 제수는 대뢰를 바쳤다.  


사실 묘호를 씀도 천자국 예법이라는데 조선은 쓰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고려도 하던 원구단은 제후국이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그런데 또 원구단을 폐지할 때도 반대의견도 상당해서, 이미 해동이 천 년도 전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단군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지 않았으므로 지속하자고 했다. 그리고 원구단을 폐지한 이후로도 조선국왕은 천제를 지내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했다.  이런 점을 보면 조선 사대부들이 성리학에 꽉 막혀서 조선을 어디까지나 제후국으로만 두고 자긍심을 가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중화식 세계관을 가졌음은 어쩔 수 없는 한계지만.



(대뢰에 대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송나라 때 책 태평광기를 보면 서민들도 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게 있으면 대뢰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병이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물을 떠다 놓고, 안 되면 소뢰를, 그래도 안 되면 대뢰를 바쳐 신에게 낫기를 기원했으며, 대뢰를 바치고도 낫지 않으면 운명이라 알고 체념했다고 한다. 또 지방의 어떤 사당에 신이 제사를 받되 대뢰를 제물로 쓰지 않으면 거들떠도 안 보는 바람에 고을 사람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뢰가 천자국의 예법이라는 말이 맞는가? 서민층에서는 규정된 예법을 지키지 않고 그저 정성에 정성을 들인다고 바칠 수 있다면 대뢰를 바친 게 아닌가 한다.)


사직단은 삼단으로 각변 가운데에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다. 사직단은 정사각꼴을 했다.  사직단의 안쪽은 붉은 흙으로 덮혔는데, 자료에 따르면 안쪽에는 오색토를 방위에 따라 깔고 그 위를 황토로 덮었을 뿐이라고 한다. 자료에는 황토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적토로 보인다.  사직단 중 동쪽에 있는 사단에는 남쪽에 돌 기둥이 박혀 있어, 흙 위로 15cm 정도 뚫고 나왔다. 지금은 사직단이 단도 두 개, 유도 두 장이다. 하지만 조선 초에는 단도 하나, 유도 한 장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명나라 홍무년간에 제정된 홍무례제를 기준으로 사직단을 만들었는데, 단이 (고려 때보다) 작아졌거니와 하나만 세우다 보니 제사를 지내기 불편했단다. 그래서 세종 때 박연이 주청하여, 홍무례제보다 더 오래된 예법을 참고하여 사단과 직단을 분리했다. 다른 신하가 주청하여 유도 하나 더 만들어, 지금처럼 단도 둘, 유도 둘이 되었다.  사직단을 서로 분리하기 이전, 단을 하나만 세운 시절에는 돌 기둥을 박아 돌기둥 왼편 오른면으로 국사신위와 국직신위를 각각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분리한 이후에는 지금처럼 사단과 국사신위,  직단에 국직신위를 모셨다. 



직단 위에서 찍은 사단 모습.  사단에 있는 석주가 보인다.



가까이에서 찍은 사단 석주.  단의 남쪽에 거의 붙어 있다.




사단에서 찍은 직단. 석주가 없다. 

 세종 때 양단으로 분리하면서

원래 있던 단을 사단으로 삼고 옆에 직단을 만든 듯하다.



사직단이 받드는 신은 누구인가?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이다.  후토는 당연히 토지신이며 후직은 稷(기장 직)이라는 글자가 보여주듯 곡식신이다. 춘추좌전 소공昭公편 기록에,  社에는 구룡句龍을 배사하고 직稷에는 后稷을 배사하는데,  하나라 이전에는 공공씨의 아들 구룡을 사라 하고 열산烈山씨 아들 주柱를 직이라 하여,  은나라 이후부터 구룡과 후직을 함께 제사 지냈다고 한다. 아직 하나라는 역사시대라고 볼 수 없으므로, 춘추좌전 기록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옛 중국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정현鄭玄(127-200)은 예기에 주를 달아 사와 직을 오토신五土神과 오곡신五穀神으로 보는 자연신설을 주장했다.  왕숙旺肅은 정현과 달리 (춘추좌전 기록대로) 구룡과 후직으로 보는 인귀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후세 학자들은 예기 교특생 조에 정현이 주를 단 대로 자연신설을 따르는 편이란다.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단에는 국사신위와 후토신위를, 직단에는 국직신위와 후직신위, 총 네 위를 모신다. 이게 사와 직이 어떤 신인지에 대한 논란 때문에 몽땅 모신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 신인 국사/국직 신위 둘, 자연신인 후토/후직 신위 둘. 


바깥쪽 유 남서쪽 구석에 조그만 당이 하나 있는데 평상시에는 신위를 그곳에서 모신다. 제사 때에만 꺼내어 사직단 위에 젯상을 차리고 그 위에 모신다. 국사와 국직신위는 단 남쪽에 두어 북향하고, 후토와 후직신위는 단 서쪽에 두어 동향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한 3일 전부터 부정을 보지 않도록 근신하며, 단을 준비하고 신위를 준비한다. 왕이 미리 와서 인사도 드린다. 제사 당일이 되면 축시에 본격적인 제례를 시작하는데, 자시엔 하늘이 열리고 축시에는 땅이 열린다고 하므로 축시에 하는 듯하다. 뭐, 옛 관습에는 제사를 자정, 혹은 01시 무렵에 지냈다고 하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서쪽 홍살문으로 왕이 들어오는데,  초헌관은 왕, 아헌관은 세자, 종헌관은 영의정이 함이 기본이다.  물론 요즘 사직대제를 지낼 때는 그냥 정오에 거행한다. 



서문에서에서 북문을 바라보며, 유와 유 사이에서 찍음.  돌로 다음은 길이 얼핏 보인다.



판위를 가까이에서 찍었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연결된 길.  서문을 바라보며 찍음.  

신위를 모신 당이 화면 왼쪽에 보인다.

 

조선의 국가제례는 영신(신을 맞아들임), 전폐(폐백을 올림), 헌작(술잔을 세 번 올림), 음복수조, 망예(축문과 폐백을 태우거나 묻으며 제사를 끝냄)가 기본이다. 영신은 젯상을 차리고 깃털과 피를 예감(유와 유 사이에 있는 구덩이, 평상시엔 덮어서 안 보임)에 묻는 것이다. 이로써 신을 초청한다.  전폐례라 하여 폐백을 올리는데, 종묘제례에서는 푸른색 폐백을 올리는데 사직대제에서는 검은색 폐백을 올린다. 왕이 검은 폐백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뒤 사직단에 있는 네 신위에 각각 대뢰를 제물로 올린다. 이때 대뢰는 날것을 올리는데, 옛날에는 화식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한다. 종묘에서도 대뢰는 날것으로 올린다. (다른 제수는 제사 전에 이미 차려놓았음) 그 뒤 축을 읽고 네 신위에 술잔을 올려 초헌하는데, 아헌이나 종헌도 독축(축을 읽음)함을 제외하면 모두 초헌 떄와 같이 한다. 그뒤 왕이 따로 자리에서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제삿상에서 음식을 가져와 음복한다. 이러면 제기를 거둔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상에 차린 제기를 살짝 움직이는데 이를 철변두라 한다. 철변두한 뒤에는 축문과 폐백을 태워 예감에 묻고 왕이 환궁한다.  사직제사는 경사스러운 일이므로 궁에서 제삿상에 있던 음식을 문무백관과 함께 음복하며 잔치를 벌인다. 


제사를 지낼 때 종묘와 마찬가지로 사직용 음악과 춤이 있어서 이를 춘다.  대한제국 이전에는 육일무를 추었는데, 육일무에 동원되는 숫자가 얼마인지 조선에서도 말이 많았단다.  6X6으로 서른여섯 명이라는 주장과, 6X8로 마흔여덟 명이라는 주장이 맞섰는데 후자를 받아들였다. 마흔여덟이라고 해도 같은 조가 계속 춤을 추지 않고 곡마다 다른 조가 추므로 실제로는 그 2배, 3배 인원을 동원한다. 


고종이 칭제건원한 이후에는 천자국 예법에 따라 신위를 국사, 국직에서 태사, 태직으로 격상하고 육일무 대신 팔일무(64명이 정사각형으로 늘어서 춤을 춤)를 추게 했다. 그러나 순종 융희 2년에 의례에 제제가 들어가 1년에 사직제사를 두 번 거행하게 했다. (원구단엔 1번, 종묘에는 4번)  그 후에는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므로 사직제사를 거행한 적이 없다. 다만 지방의 사직단에서는 민중이 농사와 관련된 제사라 하여 자체적으로 거행했을 뿐이다.


1988년에 들어서야 올림픽에 맞추어 문화재를 복원하자는 생각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비로소 사직대제를 복원하여 거행했다. 그 이후에는 종로구청에서 후원하고 대동종약원에서 거행했으며, 지난 200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111호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사직제례를 복원함에 있어 춤이나 곡, 제수 음식에 대한 고증이 미비한 점이 있어 보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일무를 출 만한 인원이 기껏해야 국악학교나 국악원에서나 있는데, 대한제국 때처럼 각 일무를 맡을 조를 여럿 두지 못하고 한 조가 다른 춤을 모두 추도록 할 뿐이라 예전처럼 장염하지는 않다. 게다가 종묘는 그나마 공간이라도 제대로 있지, 사직단은 일제시대에 경내를 대폭 축소하고 남은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만한 인력이 모이기에도 비좁다. 여러 가지로 씁쓸하다. 

서문 밖에서 사직단을 바라보며 찍음. 유가 두 장임이 보인다.


<<원래는 2008/11/14 21:35에 올렸던 글이지만 시간을 바꾸어 다시 올려봅니다.>>

      전통제례  |  2013. 7. 19. 22:51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영어로 Leonine prayer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마 전례에서는 1970년 전례개혁 이전까지 평미사(노래하는 등 장엄예식이 없이 거행한 미사, 대개 평일에 미사드리거나 사제 혼자, 혹은 복사만 데리고 미사 드릴 때 이렇게 했다. 전례개혁 이전까지는 가장 흔한 미사 형태이고 했다.) 후에는 미사의 마무리 기도까지 모두 마치고도 몇 가지 추가적인 기도를 더 했다.  이 기도는 원칙적으로는 미사에 속하지 않지만 빼먹질 않았으므로 사실상 미사의 진정한 마지막 예식이었다. 


성모송 세 번

성모찬송경(Salve Regina)+교회를 위한 기도 (하나의 기도인데 전반부는 성모찬송경이고 후반부는 교회를 위한 기도로 구성돼 있다.)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이중 마지막 기도는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가 환상을 본 뒤 작성한 기도로 유명하다.  레오 13세는 어느날 좌중이 있는 자리에서 기도 중에 느닷없이 환상을 보았는데, 악마가 하느님 앞에서 백 년만 시간을 준다면 교회를 유린할 수 있노라 장담했다는 내용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레오 13세는 특별히 미카엘 대천사에게 악마를 지옥으로 던져달라는 내용으로 기도문을 작성해서, 평미사를 마친 뒤 드리는 기도의 마지막에 덧붙였다.  레오 13세는 손수 이 기도를 작성했고 즐겨 바쳤다고 전해지는데, 후임 교황 비오 12세인가(기억이 가물) 이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 성심께 드리는 단원을 다시 덧붙였다.  이 기도는 꼭 미사 때가 아니더라도 바치면 3년 한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하지만 이 기도문 작성은 전례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악마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싶었던 레오 13세의 뜻과는 별개로, 미사라는 종교의례의 구조를 흐트러놓았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사가 마무리되면 정말로' 끝이 나야' 하는데, 원직적으로는 끝이 났는데도 다른 기도문이 덧붙여져 사실상 미사의 마무리 의식 노릇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그래서 있는 기도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판에 다른 기도를 덧붙였으니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기도는 1970년에 발표된 전례개혁 이전까지 평미사 후 마무리 기도로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이 기도문에 붙어 있던 한대사도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조치로 삭제되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3년 한대사라느니 300일 한대사라느니 하는 햇수를 없앴다. 한대사는 그냥 한대사일 뿐 다른 구분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와는 별개로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전히 교회를 위해서 이 기도를 가급적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매일 바쳐주기를 바랐다. 


Sancte Michael archangele, defende nos in praelio: contra nequitiam et insidias  diaboli esto praesidium.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 tuque, Princeps militiae caelestis, satanam aliosque spiritus malignos,  qui ad perditionem animarum pervagantur in mundo, divina virtute in infernum detrude, Amen.

(Cor Iesu sacratissimum, miserere nobis)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인 번역문은 이러하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 그리고 천상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번역문에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라고 된 부분은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의 번역인데,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그자에게 명령하시기를 겸손되이 청하나이다" 정도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지 원문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각국어 번역판을 보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악마를 억제해 달라는 내용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번역하든 악마를 엿먹여 달리는 쪽으로 번역함은 다들 똑같다. 


나는 이 기도문을 보고 레오 13세가 환상을 보았단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별로 길지도 않은 기도문이 상당히 산만하게 작성됐다.  처음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기도하다가 중간에 하느님으로 대상이 바뀌어 한 문장, 그리고 다시 미카엘 대천사로 대상이 바뀐다. 


레오 13세 교황님은 잘 배운 지식인인데 별로 길지도 않은 기도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산만하다니, 이 기도문을 작성할 때 정말로 굉장히 심란했던 거라고 보고 있다. 

(2012/02/08 23:06 )

'전례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금요일 예식, 반유대주의  (0) 2013.09.29
성만찬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  (2) 2013.07.26
예수님의 고통  (0) 2013.07.19
그런저런 이야기  (0) 2013.06.30
아나포라 제4 양식  (0) 2013.06.30
      전례사/교회사  |  2013. 7. 19. 21:57





십자가의 성 바오로. 수도복 왼편에 수도회 문장이 달려 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계시적으로 보았다는 예수고난회 문장.

이 문장 또한 예수 성심을 연상케 하는 심장 형태다.

JESU XPI PASSIO라는 문장은 라틴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라틴어로 CHRISTI라고 써야 했겠지만, 

문장의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근을 그리스어 약자로 써서 XP라고만 쓰고

위에 거룩한 단어의 약자임을 뜻하는 막대를 그렸다.

동방교회의 이콘에서 흔히 보이는 방법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1694~1775)가 1720년쯤에 훗날 예수고난회(Passionists)의 상징이 되는 문장을 환시로 목격한다. 또한 나중에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이 "너는 내 거룩한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끊임없이 슬퍼하는 수도회를 설립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1741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예수고난회 회칙을 인준하면서 "교회에서 제일 먼저 창설되었어야 할 수도회가 이제서야 나타났다"라고 하였다. 물론 새 수도회를 인준하면서 축복하는 말을 한 것일 터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함은 특히 중세-르네상스기의 영성에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적지 않다. 고통을 묵상하다 못해 일체함은 성흔이라는 기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흔을 받은 최초의 인물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한다. 현대인 중에는 이탈리아 사람인 오상의 성 비오 신부(1887~1968)가 있다. 생전에 예수고난회 수녀가 되길 바랐던 성녀 젬마 갈가니(1878~1903) 역시 몇 년 동안 성흔이 있었으며, 특히 금요일이면 성흔이 뚜렷해지고 고통도 심해졌다고 한다. 


나는 가톨릭 신앙생활이나 영성에서 고통을 묵상함은 '연대'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고통을 함께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만약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한다면 동지애(?)나 연대감(?)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특히 예수 성심(聖心) 신심에서 드러난다. 이 신심은 프랑스의 성녀 마르가리타 알라코크(1647~1690)가 1673년부터 접했다는 환시를 계기로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이 신심은 예수님이 게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시기 직전인 성 목요일 밤, 예수님이 심란해하며 기도하셨으나 사도들은 같이 깨어 있지 못하였으니, 매주 목요일 밤에 한 시간만이라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기도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성에 집중하는 신심으로 예수님의 내적 고통을 위로하려고 한다.



예수 성심을 그린 전통적인 성화


 이 신심의 상징은 불타는 심장이다. 실제 심장 위치는 가슴 한가운데가 아니라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성화에서는 흔히 가슴 한가운데에 그린다. 심장의 실제 위치와 달라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실제 심장이 아니라 '거룩한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룩한 마음은 인간의 죄악에 고통받고 슬퍼하므로, 신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아예 이 심장만 따로 떼어 표지로 삼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성 안니발레 신부가 1887년에 '거룩한 열정의 딸 수녀회'를 창설하며 도안한 문장.

성 안니발레가 평생의 모토로 삼은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라는,

불가타 성경에서 인용한 글귀가 심장을 둘렀다.   



예수 성심 신심은 아주 쉽게 성모신심과 결합하였다. 천주교 신심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가 "성모님은 예수님께 깊이 일치하셨고 고통도 내적으로 함께 하셨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선 꽤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논픽션 '더 라이트'에서 2차 인용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구마사제인 바몬테 신부가 장엄구마를 하면서 악마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을 녹음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 밑에서 그녀(성모님)는 그리스도가 흘리는 피를 두 손으로 모았고 그 두 손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녀는 하느님을 찬양했고 감사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분을 용서했고 사랑했으며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같이 고통을 느끼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았고 나(악마)는 고통받았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크게 기뻐하고자 했지만 그녀는 우리를 자신의 울음으로 죽게 했다. 그녀의 눈물은 우리를 죽이는 불과 같다." 


이 말을 했다는 사람이 정말로 악마에 씌어서 이러했는지는 따지지 말자. 다만 이 내용은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이 성모신심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수님의 고통에 연대하면서, 또한 예수님의 고통을 보고 고통받았던 성모님의 고통에도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에 집중하는 신심이 성모신심과 연계됨은 어떤 의미로는 차라리 필연이었다.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중 '칠락 묵주'(성모님 일생의 일곱 가지 즐거움을 묵상하는 기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칠고 묵주'(성모님 일생의 일곱 가지 큰 고통을 묵상하는 기도)가 더 환영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 성심 신심과 마찬가지로 성모 성심에 대한 것도 나타났다. 



성모성심을 흔히 칼에 찔린 모양으로 그린다. 

루카 복음서에서 시메온이 "그대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 성심 신심은 기존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방식으로 전개됐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하느님 자비의 신심'을 든다. 이것은 폴란드 수녀인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성녀가 환시를 받아 전했다고 한다. 




위 그림은 파우스티나 성녀가 1931년에 받았다는 환시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가슴에서 두 갈래 빛이 나오는데, 파우스티나 성녀에 따르면 이는 예수님 십자가 고난 때 로마 군인의 창에 옆구리가 찔리면서 나온 물과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갈래 빛은 옆구리에서 나와야 정상일 것 같지만 심장 부위에서 나온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보고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 성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예수 성심 신심은 예수님의 고통을 위로하길 바라는 것이지만 자비 신심은 다르다. 고통을 감내할 정도인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마음에 의탁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신심이 '하느님 자비의 신심'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Divine mercy라고 불린다. 이전의 신심에서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가슴 아플 정도의 일체화를 추구했던 반면, 이 신심은 그런 고통을 감내할 정도인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죄의 용서를 구한다. 대체로 중세-르네상스기에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엄격해져서 '정의만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성모신심은 특히 이러는 와중에 강화됐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벌하고자 하나, 자비로운 성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벌을 유보한다는 식의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그러나 자비 신심은 그 이름대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는 과거의 유산(?)과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전례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금요일 예식, 반유대주의  (0) 2013.09.29
성만찬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  (2) 2013.07.26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0) 2013.07.19
그런저런 이야기  (0) 2013.06.30
아나포라 제4 양식  (0) 2013.06.30
      전례사/교회사  |  2013. 7. 19. 14:00




시방 조선은 물론 왜국에서도 덕후들 사이에서 운명/밤샘 3차 애니화 때문에 말이 많은 줄 압니다. 역시나 타입달에서 사골 끓이는 솜씨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역시 상식이 돼버린 비난은 어디 안 가죠. 솔직히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생각해도 진짜 너무했어요 (____).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밤샘이 다시 애니화된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이 듦은 제가 달빠란 증거겠지요. UFO 놈들이 도대체 무슨 루트를 기반으로 애니화할 것인가에 대해 공식정보가 없어서 덕후들끼리 말이 많은데요, 대체로 HF 루트가 기반이리란 데에 의견이 모입니다. 의견이라고 할 것도 없죠. 예전에 스튜디오 딘이 운명 루트와 검제 루트를 애니화했으니 남는 것은 HF밖에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운명/0을 UFO 놈들이 애니화한 결과를 비교해보면 어디가 더 잘 만들었는지는 명약관화하단 점에서, 타입달이 사골만 끓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성하는 호구 덕후이 말이 많음은 당연합니다. 더불어 운명 시리즈의 메인 히로인들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평이 가장 안 좋은 벚꽃이가 HF루트에서 중심에 있기 때문에 덕후들 사이에서 말이 더욱 안 좋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만 해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기사왕 처자고 가장 간지 있다고 생각하는 루트는 검제 쪽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번 애니화에 대해서 한 가지 희망사항이 있습니다. 


발매기일에 밀려 끝내 HF루트에 합병되어 사라졌다는 


환상의 이리야 루트……!!! 


이리야 루트를 기반으로 애니화해주지 않을까 하는, 도박과도 같은 이 희망! 


제발!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관에서 읽은 이야기  (4) 2013.09.02
푸념  (0) 2013.08.16
복자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결정  (0) 2013.07.08
도자기 잔  (0) 2013.07.07
새 블로그 첫 글  (2) 2013.06.30
      잡담  |  2013. 7. 14. 19:43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임 교황 두 분을 시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복자 요한 23세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비록 (하느님의 종)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의 시복, 시성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안타깝지만,  내가 내내 시성을 바라던 세 분 중 두 분이 동시에 시성이 확정되어 기쁘다.  요한 23세의 경우 나는 중세 이후로 가톨릭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 탁월한 식견을 갖춘  예언자적 교황이라고 높이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워낙 인기 있는 관계로 (_____)  요한 바오로 2세보다 훨씬 늦게 시성되리라 생각해왔다.  내 살아 있을 때 시성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는데 동시에 시성이 결정되니 기쁘기 짝이 없다.  


만약 그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야겠다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공의회가 과거의 공의회와 달리 교리적 결정 대신 '현대사회에서 가톨릭이 있어야 할 위치'를 논하기로 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믿는 종교인 가톨릭 교회는 현대 사회와 괴리되어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말라비틀어져갔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글에서 요한 23세를 언급할 때는 종종 '진실로 위대한 교종/교황'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추기경단 사이에서 큰 파워가 없던 고령의 교황이 이런 업적을 남기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가끔 하는 비유가 요한 23세께서는 무대를 만들기 시작하셨고,  바오로 6세는 무대를 완성시키셨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무대를 잘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시성식은 12월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Beati Romani episcopi, Ioannes XXIII et Ioannes Paule II

orate pro nobis!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관에서 읽은 이야기  (4) 2013.09.02
푸념  (0) 2013.08.16
운명/밤샘 3차 애니화 관련으로 이야기해 봅니다.  (4) 2013.07.14
도자기 잔  (0) 2013.07.07
새 블로그 첫 글  (2) 2013.06.30
      잡담  |  2013. 7. 8. 02:31




사진 찍어서 컴퓨터로 옮기기 귀찮아서 사진 없이 이야기하는데, 나는 도자기를 꽤나 좋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도 도자기 쪽에서 오래 머무르고, 고려청자 특별전시회를 열었을 때에도 거기에 갔다. 물론 내 주머니는 일반인 학생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좋은 도자기를 사거나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또 술을 좋아하다 보니 취향의 교집합으로 도자기 술잔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다. 


실제로 알아보면 '도자기 술잔'이라고 처음부터 파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이 술잔이라고 하면 유리 소주잔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본 음식점에서 사케라도 내놓을 때에야 비로소 도자기 '술잔'이 나오는 편인데, 문제는 거기 술잔은 내 취향이 아니란 점이다. 도자기 잔은 대부분 찻잔이다. 다구 세트의 일부로 잔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찻잔이라고 만들다 보니 술잔으로서는 좀 크다. 조금만 더 작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술을 조금 덜 따르는 수밖에. 


나는 다이소에서 도자기 찻잔을 사서 술잔으로 썼다. 왜 하필 다이소냐. 매장은 흔하고 상품은 싸니까. 우리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술잔을 챙기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아쉬운 대로 찻잔을 술잔 삼아 술을 마셨다. 그런데 점점 다이소 찻잔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유는 색깔. 옛날 도자기 유약 같은 색이 아니라 염료를 쓴 듯한 색이라 결국 내가 못 참고 새로 도자기 잔을 하나 사기로 했다. 고급스런 다구 세트로 사려면 비싸지만, 찻잔 하나만 살 경우에는 아무리 비싸도 만 원을 안 넘는다. 아니, 실질적으로는 5천 원을 안 넘는 것을 알고 좋아했다. 내가 본 찻잔 중에 4-5만원 하는 것도 있긴 했는데, 그건 안쪽을 금으로 도금해서 그런 거고. 도자기 값이 아니라 금 값이다. 


인사동에 가서 적당히 찻잔을 파는 데가 없나 뒤졌는데 고급 다구 세트를 파는 경우가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다. 결국 가게 하나를 찾아서 들어갔는데, 의외로 보다 보니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사기가 마음에 들어서 하나 샀다. 가격은 3천 원. 이만 하면 싸지. 도자기 표면에 유약이 거북이 껍질처럼 갈라진 것도 마음에 들고. 청화로 간단하게 그린 꽃도 마음에 들고. 


집에 와서 이 찻잔으로 술을 마셔봤는데 어라, 잔이 입에 닿는 느낌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다구를 도자기로 만드는가 보구나 싶었다. 가격 3천 원에서도 알 수 있듯, 절대 고급이 아니지만 내 마음에 딱 든다면 그게 고급이지.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관에서 읽은 이야기  (4) 2013.09.02
푸념  (0) 2013.08.16
운명/밤샘 3차 애니화 관련으로 이야기해 봅니다.  (4) 2013.07.14
복자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결정  (0) 2013.07.08
새 블로그 첫 글  (2) 2013.06.30
      잡담  |  2013. 7. 7. 11:53




금기진 지음, <미스터 크롤리: 대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롤리 평전>, 2003, 모자이크


맨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외국 책을 번역한 줄 알았다. 그런데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오컬티스트가 지은 책이었다.  책 앞날개에 씐 저자 약력에서는 1999년에 동방성당기사단(O.T.O)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름 적재적소의 인물이 크롤리 전기를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런데 책을 다 읽어보고 난 이후의 내 느낌은 


"내가 두 번 다시 오컬티스트가 쓴 책을 읽나 봐라."


................................................


이거, 전기물로서는 빵점이다.  알레이스터 크롤리란 인간의 행적보다는 오컬트 해설에만 노골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알레이스터가 유명한 오컬티스트인 만큼,  그이의 전기를 쓴다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오컬트에 대한 해설,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컬트적인 부분은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지만, 막상 행적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하고 간지가 나는 부분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알레이스터는 1934년에 영국에서 명예훼손으로 다른 사람을 고소하여 재판을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증인으로 올라온 사람 중에는 '베티 메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알레이스터의 마법 제자인 '라울 러브데이'의 아내였다. 베티 메이는 알레이스터가 기묘한 카리스마와 수행으로 남편이 죽게 했으며, 동물희생을 바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알레이스터는 그런 적 없으며 베티가 정신이상자라고,  자기는 오히려 인내와 사랑으로 보살폈다고 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직접 베티와 알레이스터가 각기 자서전에 쓴 바를 몇 장씩 인용하면서 길게 설명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역시 알레이스터 편을 들어 설명한다.  베티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을 넘기면 저자는 알레이스터 행적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알레이스터가 패소해서 돈을 물어야 했으며,  몇 년 뒤에는 파산신청까지 했다고 말이다. 


"결국 이렇게 전 재산을 날려버린 노년의 크롤리는 마법조직 동방성당기사단이 보내주는 연금만으로 생활하며 이 하숙집 저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194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


평색이 크롤리 일생만 다룬 평전이면서 재판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심지어 위키페디아보다도 설명이 부실하다.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종종 저자는 독자를 가르치려고 든다.  아무리 평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기인데,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가 복음서를 편집했고,  관련 증거를 없앴다는 주장에 이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알레이스터가 재판을 건 것에 대해서도 저자 스스로 인정하기를,  다른 전기 작가들은 대부분 알레이스터가 당시에 자금이 쪼달렸기 때문에 재판을 통해서 돈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마저도 오컬트적으로 주장한다.  알레이스터는 재판에서 질 줄 알았지만,  나자렛 예수가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 했듯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크롤리도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나자렛 예수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므로,  왜 현실시대의 인물인 크롤리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조작된' 신화적 인물인 예수를 따라야 했다고 주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겠지.  


아마 다른 작가라면 간단히만 설명하고 넘어갈 만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도 오컬트적인 부분을 소개하려고 길게 소개한다.  알레이스터과 황금새벽단에 있던 시절에 '문 차일드'라는 소설을 썼다는데,  이 소설에서 묘사된 마법 전투 이야기를 8쪽에 걸쳐 인용한다.  알레이스터가 자기 전생이라며 주장하는 내용도 10쪽 가까이 설명한다.  


알레이스터와 (아일렌드의 유명한 문인인)  예이츠가 똑같이 황금새벽단에 있었는데,  알레이스터는 예이츠가 악마적인 마법을 행하며,  예이츠가 자기의 시적 재능을 무섭게 질투했다고 주장한다.  앞서 이야기한 소설 문 차일드에서도 예이츠의 이름을 바꾼 사악한 마법사 '게이츠'가 선한 마법사들을 공격하다가 죽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예이츠가 정말로 그랬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잘해 봐야 예이츠가 알레이스터의 시적 재능을 질투했다는 부분에서 '알레이스터의 말이 사실이라면'이라고 부언하는 정도다. 


알레이스터는 자기 전생 중 하나가 저 유명한 막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알렉산데르 6세를 단순한 변태 교황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한다.  글세?  가톨릭 신자조차 옹호하길 포기한 교황사상 최악의 교황이?  만약 알레이스터가 저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역시 알렉산데르 6세를 기꺼이 '변태 교황'으로 보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 아는 지인이 말했다. 


"오컬티스트들은 종종 자기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아요."


나도 동의한다.


이 책을 보고 너무 답답해서 제대로 된 전기가 없을까 싶어서 아마존을 뒤져봤다. 전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대부분 오컬티스트들이 썼고,  오컬티스트가 아닌 사람이 쓴 전기는 (내가 본 바로는) 한 권밖에 없다. 물론 아마존 내에서는 별로 평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평을 남긴 사람들도 '중립적으로 쓰려고 한 게 보인다'라고 평가하니,  언젠가 사볼까 한다.  언젠가. 


덧붙임:  이 책을 보고 구글링해보는 중에  알레이스터가 사망한 마을 사람이라며 올린 글을 읽었는데,  자기 마을에서는 알레이스터가 죽으면서 마을을 저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랬다.  워낙 인물이 인물이다 보니 그런 전설이 생길 법도 하다. 

'역사/사회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Babilido  (0) 2013.08.03
아프가니스탄 사건 영화화 소식을 듣고  (2) 2013.07.25
신의 섬, 오키노시마 이야기  (1) 2013.06.30
태평광기를 읽다가 크게 웃었다.  (0) 2013.06.30
나라란?  (0) 2013.06.30
      역사/사회단상  |  2013. 7. 2. 20:40



에스페로스's Blog is powered 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