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진 지음, <미스터 크롤리: 대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롤리 평전>, 2003, 모자이크


맨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외국 책을 번역한 줄 알았다. 그런데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오컬티스트가 지은 책이었다.  책 앞날개에 씐 저자 약력에서는 1999년에 동방성당기사단(O.T.O)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름 적재적소의 인물이 크롤리 전기를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런데 책을 다 읽어보고 난 이후의 내 느낌은 


"내가 두 번 다시 오컬티스트가 쓴 책을 읽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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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전기물로서는 빵점이다.  알레이스터 크롤리란 인간의 행적보다는 오컬트 해설에만 노골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알레이스터가 유명한 오컬티스트인 만큼,  그이의 전기를 쓴다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오컬트에 대한 해설,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컬트적인 부분은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지만, 막상 행적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하고 간지가 나는 부분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알레이스터는 1934년에 영국에서 명예훼손으로 다른 사람을 고소하여 재판을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증인으로 올라온 사람 중에는 '베티 메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알레이스터의 마법 제자인 '라울 러브데이'의 아내였다. 베티 메이는 알레이스터가 기묘한 카리스마와 수행으로 남편이 죽게 했으며, 동물희생을 바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알레이스터는 그런 적 없으며 베티가 정신이상자라고,  자기는 오히려 인내와 사랑으로 보살폈다고 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직접 베티와 알레이스터가 각기 자서전에 쓴 바를 몇 장씩 인용하면서 길게 설명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역시 알레이스터 편을 들어 설명한다.  베티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을 넘기면 저자는 알레이스터 행적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알레이스터가 패소해서 돈을 물어야 했으며,  몇 년 뒤에는 파산신청까지 했다고 말이다. 


"결국 이렇게 전 재산을 날려버린 노년의 크롤리는 마법조직 동방성당기사단이 보내주는 연금만으로 생활하며 이 하숙집 저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194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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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색이 크롤리 일생만 다룬 평전이면서 재판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심지어 위키페디아보다도 설명이 부실하다.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종종 저자는 독자를 가르치려고 든다.  아무리 평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기인데,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가 복음서를 편집했고,  관련 증거를 없앴다는 주장에 이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알레이스터가 재판을 건 것에 대해서도 저자 스스로 인정하기를,  다른 전기 작가들은 대부분 알레이스터가 당시에 자금이 쪼달렸기 때문에 재판을 통해서 돈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마저도 오컬트적으로 주장한다.  알레이스터는 재판에서 질 줄 알았지만,  나자렛 예수가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 했듯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크롤리도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나자렛 예수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므로,  왜 현실시대의 인물인 크롤리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조작된' 신화적 인물인 예수를 따라야 했다고 주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겠지.  


아마 다른 작가라면 간단히만 설명하고 넘어갈 만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도 오컬트적인 부분을 소개하려고 길게 소개한다.  알레이스터과 황금새벽단에 있던 시절에 '문 차일드'라는 소설을 썼다는데,  이 소설에서 묘사된 마법 전투 이야기를 8쪽에 걸쳐 인용한다.  알레이스터가 자기 전생이라며 주장하는 내용도 10쪽 가까이 설명한다.  


알레이스터와 (아일렌드의 유명한 문인인)  예이츠가 똑같이 황금새벽단에 있었는데,  알레이스터는 예이츠가 악마적인 마법을 행하며,  예이츠가 자기의 시적 재능을 무섭게 질투했다고 주장한다.  앞서 이야기한 소설 문 차일드에서도 예이츠의 이름을 바꾼 사악한 마법사 '게이츠'가 선한 마법사들을 공격하다가 죽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예이츠가 정말로 그랬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잘해 봐야 예이츠가 알레이스터의 시적 재능을 질투했다는 부분에서 '알레이스터의 말이 사실이라면'이라고 부언하는 정도다. 


알레이스터는 자기 전생 중 하나가 저 유명한 막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알렉산데르 6세를 단순한 변태 교황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한다.  글세?  가톨릭 신자조차 옹호하길 포기한 교황사상 최악의 교황이?  만약 알레이스터가 저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역시 알렉산데르 6세를 기꺼이 '변태 교황'으로 보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 아는 지인이 말했다. 


"오컬티스트들은 종종 자기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아요."


나도 동의한다.


이 책을 보고 너무 답답해서 제대로 된 전기가 없을까 싶어서 아마존을 뒤져봤다. 전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대부분 오컬티스트들이 썼고,  오컬티스트가 아닌 사람이 쓴 전기는 (내가 본 바로는) 한 권밖에 없다. 물론 아마존 내에서는 별로 평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평을 남긴 사람들도 '중립적으로 쓰려고 한 게 보인다'라고 평가하니,  언젠가 사볼까 한다.  언젠가. 


덧붙임:  이 책을 보고 구글링해보는 중에  알레이스터가 사망한 마을 사람이라며 올린 글을 읽었는데,  자기 마을에서는 알레이스터가 죽으면서 마을을 저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랬다.  워낙 인물이 인물이다 보니 그런 전설이 생길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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