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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참 재미나단 생각이 든다.  고려에도 사직단이 있었는데 고려 사직단은 천자국 예법에 따라 사직단 각 단 길이를 5장으로 했다. 그런데 고려는 중국의 옛 예법을 엄밀히 따르지는 않았다. 중국 예법에 따르면 사직단 신위는 북향해야 하는데, 고려에서는  남향하도록 했다.  조선은 경복궁을 지은 뒤 종묘와 사직을  종묘를 만들었다. 종묘를  세움은 대작업이라 실록에 기록이 세세하게 남았지만 사직을 만듦은 별로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 실록에도 기록이 변변찮다.  (종묘와 사직단을 모두 가 보면, 사직을 세움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가슴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직은 대단히 중요했다. 흔히들 종묘사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종묘보다 사직이 위다. 국상을 맞아 종묘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건만 사직에는 제사를 지낼 정도니 말이다.  종묘는 왕가 일원이 결속하는 자리지만, 사직은 왕을 중심으로 만백성이 결속하는 자리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빌어 풍요를 기원하는 곳이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면,  사직단이야말로 농사의 성지로 땅의 중심이다.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을 세웠다.  좌묘우사인데 왜 종묘가 동쪽,  사직이 서쪽인가? 옛 예법에는 군주를 북신, 즉 북극성에 비견하여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를 기준으로 좌우를 따지기 때문에 남향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진다.  경복궁에서 남향함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지니까 당연히 좌측이 동쪽, 우측이 서쪽이다. 



사직단 주변에 두 겹으로 담을 둘러쌓는데,  이 담을 유(壝)라고 부른다.  바깥쪽 유에는 동서남북으로 홍살문이 하나씩 있다. 유를 넘어서 들어가면 제단이 두 개가 있는데, 동쪽이 社단, 서쪽이 稷단이다. 사직단 내에서 방위를 정할 때는 실제 방위를 따지지 않는다.  사직단이 경복궁 서쪽에 있으므로, 사직단을 기준으로는 경복궁이 동쪽에 있다.  그러므로 경복궁을 향한 동쪽을 <의례상> 북쪽이라고 하고 방위를 정한다. 사단이 동쪽, 직단이 서쪽이라는 말도 경복궁쪽을 기준으로 삼아 한 말이므로, 실제방위를 따지면 사단이 남쪽, 직단이 북쪽이다. 이 글에서도 실제방위가 아닌 의례상 방위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설명한다. 



바깥쪽 유와 안쪽 유에는 모두 홍살문이 있다. (그러니까 모두 8개) 실제로 사직단에 가면 북쪽 홍살문이 정문인 줄 알기 쉽다.  홍살문 단이 3단이라 넓직해서 그렇다.  하지만 실제 정문은 서쪽 홍살문이다. 북쪽 홍살문은 신이 오는 방향이라 하여 3단으로 넓직하게 만들었을 뿐, 출입하기는 서쪽 홍살문으로 했기 때문이다. 북쪽 홍살문에서 서쪽 홍살문까지 네모난 돌을 깔아 길을 만들었는데, 유와 유 사이 공간만 지난다. 북쪽 홍살문과 사직단 가까운 곳에 돌을 도드라지게 쌓아 판위를 만들었다. 판위란 제사 때 왕이 서는 곳이다. 



바깥쪽 유의 북쪽에 있는 홍살문.  3단이다.



북쪽 홍살문 두 개를 비교한 것.

안쪽 유에 있는 홍살문은 1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문 사이에 있는, 왕이 서는 자리인 판위가 보인다.


조선의 예법으로는 사직단에 정월 신일申日에 기곡제祈穀祭를, 음력 2월과 8월 상순 무일戊日에 중삭제仲朔祭를, 납일臘日에 납향을 지냈다. 나라에 흉한 일이나 길한 일이 생겼을 때에도 이를 고하고자 제사를 지냈다.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납일은 동지 이후 3번째 무일을 뜻하는데 이는 조선 기준이다. 중국에서는 중삭도 2월과 8월 상순 술일戌日에 지냈고, 납일 또한 동지 후 세 번째 술일이었다. 납일에는 짐승을 사냥하여 바쳤다고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납일에 눈이 내리면 이를 녹여 납설수臘雪水라 부르며 약에 쓴다고 한다. 




유에 둘러쌓인 사직단.  유가 둘임을 알 수 있다.



사직과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다른 제수와 함께 대뢰大牢를 바친다. 대뢰란 소, 양, 돼지를 제수로 함을 뜻한다.  소뢰小牢는 양과 돼지를 말한다. 대뢰를 바침은 천자국의 예법이요, 소뢰를 바침은 제후국의 예법이라는데  조선은 기꺼이 대뢰를 바쳤다. 원래는 종묘에만 대뢰를 바쳤다는데, 사직은 소뢰를 바치면서 종묘에는 대뢰를 바침은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사직에도 대뢰를 바치기로 예법을 바꾸었다. 대한제국 이전까지 조선의 예법은 제후국과 천자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고려 때에는 사직단이 5장이고 사직단의 신위도 태사太社, 태직太稷이었는데 이는 천자국 예이다. 조선은 제후국 예를 따라 사직단은 2장 5척으로 하고 신위도 국사國社, 국직國稷으로 했다. 그러면서도 제수는 대뢰를 바쳤다.  


사실 묘호를 씀도 천자국 예법이라는데 조선은 쓰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고려도 하던 원구단은 제후국이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그런데 또 원구단을 폐지할 때도 반대의견도 상당해서, 이미 해동이 천 년도 전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단군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지 않았으므로 지속하자고 했다. 그리고 원구단을 폐지한 이후로도 조선국왕은 천제를 지내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했다.  이런 점을 보면 조선 사대부들이 성리학에 꽉 막혀서 조선을 어디까지나 제후국으로만 두고 자긍심을 가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중화식 세계관을 가졌음은 어쩔 수 없는 한계지만.



(대뢰에 대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송나라 때 책 태평광기를 보면 서민들도 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게 있으면 대뢰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병이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물을 떠다 놓고, 안 되면 소뢰를, 그래도 안 되면 대뢰를 바쳐 신에게 낫기를 기원했으며, 대뢰를 바치고도 낫지 않으면 운명이라 알고 체념했다고 한다. 또 지방의 어떤 사당에 신이 제사를 받되 대뢰를 제물로 쓰지 않으면 거들떠도 안 보는 바람에 고을 사람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뢰가 천자국의 예법이라는 말이 맞는가? 서민층에서는 규정된 예법을 지키지 않고 그저 정성에 정성을 들인다고 바칠 수 있다면 대뢰를 바친 게 아닌가 한다.)


사직단은 삼단으로 각변 가운데에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다. 사직단은 정사각꼴을 했다.  사직단의 안쪽은 붉은 흙으로 덮혔는데, 자료에 따르면 안쪽에는 오색토를 방위에 따라 깔고 그 위를 황토로 덮었을 뿐이라고 한다. 자료에는 황토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적토로 보인다.  사직단 중 동쪽에 있는 사단에는 남쪽에 돌 기둥이 박혀 있어, 흙 위로 15cm 정도 뚫고 나왔다. 지금은 사직단이 단도 두 개, 유도 두 장이다. 하지만 조선 초에는 단도 하나, 유도 한 장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명나라 홍무년간에 제정된 홍무례제를 기준으로 사직단을 만들었는데, 단이 (고려 때보다) 작아졌거니와 하나만 세우다 보니 제사를 지내기 불편했단다. 그래서 세종 때 박연이 주청하여, 홍무례제보다 더 오래된 예법을 참고하여 사단과 직단을 분리했다. 다른 신하가 주청하여 유도 하나 더 만들어, 지금처럼 단도 둘, 유도 둘이 되었다.  사직단을 서로 분리하기 이전, 단을 하나만 세운 시절에는 돌 기둥을 박아 돌기둥 왼편 오른면으로 국사신위와 국직신위를 각각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분리한 이후에는 지금처럼 사단과 국사신위,  직단에 국직신위를 모셨다. 



직단 위에서 찍은 사단 모습.  사단에 있는 석주가 보인다.



가까이에서 찍은 사단 석주.  단의 남쪽에 거의 붙어 있다.




사단에서 찍은 직단. 석주가 없다. 

 세종 때 양단으로 분리하면서

원래 있던 단을 사단으로 삼고 옆에 직단을 만든 듯하다.



사직단이 받드는 신은 누구인가?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이다.  후토는 당연히 토지신이며 후직은 稷(기장 직)이라는 글자가 보여주듯 곡식신이다. 춘추좌전 소공昭公편 기록에,  社에는 구룡句龍을 배사하고 직稷에는 后稷을 배사하는데,  하나라 이전에는 공공씨의 아들 구룡을 사라 하고 열산烈山씨 아들 주柱를 직이라 하여,  은나라 이후부터 구룡과 후직을 함께 제사 지냈다고 한다. 아직 하나라는 역사시대라고 볼 수 없으므로, 춘추좌전 기록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옛 중국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정현鄭玄(127-200)은 예기에 주를 달아 사와 직을 오토신五土神과 오곡신五穀神으로 보는 자연신설을 주장했다.  왕숙旺肅은 정현과 달리 (춘추좌전 기록대로) 구룡과 후직으로 보는 인귀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후세 학자들은 예기 교특생 조에 정현이 주를 단 대로 자연신설을 따르는 편이란다.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단에는 국사신위와 후토신위를, 직단에는 국직신위와 후직신위, 총 네 위를 모신다. 이게 사와 직이 어떤 신인지에 대한 논란 때문에 몽땅 모신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 신인 국사/국직 신위 둘, 자연신인 후토/후직 신위 둘. 


바깥쪽 유 남서쪽 구석에 조그만 당이 하나 있는데 평상시에는 신위를 그곳에서 모신다. 제사 때에만 꺼내어 사직단 위에 젯상을 차리고 그 위에 모신다. 국사와 국직신위는 단 남쪽에 두어 북향하고, 후토와 후직신위는 단 서쪽에 두어 동향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한 3일 전부터 부정을 보지 않도록 근신하며, 단을 준비하고 신위를 준비한다. 왕이 미리 와서 인사도 드린다. 제사 당일이 되면 축시에 본격적인 제례를 시작하는데, 자시엔 하늘이 열리고 축시에는 땅이 열린다고 하므로 축시에 하는 듯하다. 뭐, 옛 관습에는 제사를 자정, 혹은 01시 무렵에 지냈다고 하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서쪽 홍살문으로 왕이 들어오는데,  초헌관은 왕, 아헌관은 세자, 종헌관은 영의정이 함이 기본이다.  물론 요즘 사직대제를 지낼 때는 그냥 정오에 거행한다. 



서문에서에서 북문을 바라보며, 유와 유 사이에서 찍음.  돌로 다음은 길이 얼핏 보인다.



판위를 가까이에서 찍었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연결된 길.  서문을 바라보며 찍음.  

신위를 모신 당이 화면 왼쪽에 보인다.

 

조선의 국가제례는 영신(신을 맞아들임), 전폐(폐백을 올림), 헌작(술잔을 세 번 올림), 음복수조, 망예(축문과 폐백을 태우거나 묻으며 제사를 끝냄)가 기본이다. 영신은 젯상을 차리고 깃털과 피를 예감(유와 유 사이에 있는 구덩이, 평상시엔 덮어서 안 보임)에 묻는 것이다. 이로써 신을 초청한다.  전폐례라 하여 폐백을 올리는데, 종묘제례에서는 푸른색 폐백을 올리는데 사직대제에서는 검은색 폐백을 올린다. 왕이 검은 폐백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뒤 사직단에 있는 네 신위에 각각 대뢰를 제물로 올린다. 이때 대뢰는 날것을 올리는데, 옛날에는 화식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한다. 종묘에서도 대뢰는 날것으로 올린다. (다른 제수는 제사 전에 이미 차려놓았음) 그 뒤 축을 읽고 네 신위에 술잔을 올려 초헌하는데, 아헌이나 종헌도 독축(축을 읽음)함을 제외하면 모두 초헌 떄와 같이 한다. 그뒤 왕이 따로 자리에서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제삿상에서 음식을 가져와 음복한다. 이러면 제기를 거둔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상에 차린 제기를 살짝 움직이는데 이를 철변두라 한다. 철변두한 뒤에는 축문과 폐백을 태워 예감에 묻고 왕이 환궁한다.  사직제사는 경사스러운 일이므로 궁에서 제삿상에 있던 음식을 문무백관과 함께 음복하며 잔치를 벌인다. 


제사를 지낼 때 종묘와 마찬가지로 사직용 음악과 춤이 있어서 이를 춘다.  대한제국 이전에는 육일무를 추었는데, 육일무에 동원되는 숫자가 얼마인지 조선에서도 말이 많았단다.  6X6으로 서른여섯 명이라는 주장과, 6X8로 마흔여덟 명이라는 주장이 맞섰는데 후자를 받아들였다. 마흔여덟이라고 해도 같은 조가 계속 춤을 추지 않고 곡마다 다른 조가 추므로 실제로는 그 2배, 3배 인원을 동원한다. 


고종이 칭제건원한 이후에는 천자국 예법에 따라 신위를 국사, 국직에서 태사, 태직으로 격상하고 육일무 대신 팔일무(64명이 정사각형으로 늘어서 춤을 춤)를 추게 했다. 그러나 순종 융희 2년에 의례에 제제가 들어가 1년에 사직제사를 두 번 거행하게 했다. (원구단엔 1번, 종묘에는 4번)  그 후에는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므로 사직제사를 거행한 적이 없다. 다만 지방의 사직단에서는 민중이 농사와 관련된 제사라 하여 자체적으로 거행했을 뿐이다.


1988년에 들어서야 올림픽에 맞추어 문화재를 복원하자는 생각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비로소 사직대제를 복원하여 거행했다. 그 이후에는 종로구청에서 후원하고 대동종약원에서 거행했으며, 지난 200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111호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사직제례를 복원함에 있어 춤이나 곡, 제수 음식에 대한 고증이 미비한 점이 있어 보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일무를 출 만한 인원이 기껏해야 국악학교나 국악원에서나 있는데, 대한제국 때처럼 각 일무를 맡을 조를 여럿 두지 못하고 한 조가 다른 춤을 모두 추도록 할 뿐이라 예전처럼 장염하지는 않다. 게다가 종묘는 그나마 공간이라도 제대로 있지, 사직단은 일제시대에 경내를 대폭 축소하고 남은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만한 인력이 모이기에도 비좁다. 여러 가지로 씁쓸하다. 

서문 밖에서 사직단을 바라보며 찍음. 유가 두 장임이 보인다.


<<원래는 2008/11/14 21:35에 올렸던 글이지만 시간을 바꾸어 다시 올려봅니다.>>

      전통제례  |  2013. 7. 19.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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