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해당되는 글 28건

대한해협 동수도,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협이라고 부르는 곳에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카타(宗像)시에 속한다. 일본어로 오키(沖)란 말에 '먼 바다'란 뜻이 있다고 하니 오키노시마(沖ノ島)란 이름은 '바다 멀리 있는 섬'이란 뜻일 것이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에 따르면 면적이 약 0.97 제곱 킬로미터(약 29만 3천 평)이라고 하니 올림픽 공원의 3분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위치는 북위 34도 14분 39초, 동경 130도 6분 20초.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243.6 미터라고 한다. 


오키노시마는 면적은 좁지만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부산-쓰시마 섬 북쪽 곶-오키노시마가 거의 직선으로 이어진다. 부산에서 오키노시마까지 약 145 킬로미터, 오키노시마에서 무나카타시까지 약 60 킬로미터 정도 된다. 


오키노시마 자체가 다고리히메(田心姬) 여신의 신체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섬에는 여자는 무조건 상륙할 수가 없다. 섬 남서쪽 해안 가까이에 오키쓰 궁(沖津宮)이라는 신사가 있는데, 뭍에 있는 무나카타 대사에서 남자 신관 한 명을 파견하여 10일 간격으로 교대케 한다고 한다. 말은 궁이라고 하지만 신격이 높아 '궁'이라고 했을 뿐 규모가 크지는 않다. 남자 신관 단 한 명만 있는데 신사 규모가 크면 관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관은 매일 아침, 바닷물에서 목욕재계한 다음 길을 따라 산에 올라가 오키쓰 궁에서 정해진 대로 예식을 올린다. (겨울에는 목욕재계를 어떻게 할까?) 


일본 기기신화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쳐울다가 아버지 이자나기에게 쫓겨나자(____) 천계 다카마노하라에 올라가 누나인 아마테라스 여신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테라스는 자기 동생 스사노오가 자길 쫓아내고 천계의 군주가 되려는 줄 알고 급히 무장하고 마중(?)나갔다. 강변에서 서로 만났는데, 스사노오는 누나가 자기를 경계함을 깨닫고는 점을 쳐보자고 제의한다. 서로의 물건으로 신을 탄생케 하자. 만약 내가 결백하다면 내 물건에서는 여신이 나올 것이다. 


먼저 스사노오가 자기 검을 아마테라스에게 건냈다. 아마테라스가 검을 입에 넣고 씹어서 뱉자 여신 셋이 나왔다. 아마테라스가 곡옥을 건네자 스사노오가 이를 받아 씹어서 뱉었다. 그러자 남신 다섯이 나왔다. 스사노오가 처음 말했던 대로 스사노오의 검에서 여신 셋이 나왔으므로,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결백함을 인정하고 타카마노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여기서도 깽판을 치다가 결국 하계로 내쫓겼다. 


일본서기에서는 아마테라스가 숨결을 불어넣자 나왔다는 세 여신이 차례대로 다고리히메(田心姬), 다기쓰히메(湍津姫),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라고 한다. 고사기에서는 차례대로 다키리비메(多紀理毘売), 이치키시마히메(市寸島比売), 다기쓰히메(多岐都比売)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이 세 여신에게 천손을 돕고, 또한 천손에게 제사를 받으라 명했기로, 세 여신이 무나카타에 내려왔다고 한다. 오키노시마, 오노시마, 그리고 본토(?) 무나카타시에서 각각 이 세 여신을 모신다.


오키노시마는 쓰시마 섬을 제외한다면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섬 교통의 요지다. 다고리히메의 신체로 여긴다면서도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곳이므로 17세기에 (지금의 후쿠오카를 다스렸던) 구로다 번(黒田藩)에서 여기에 병력을 일부 주둔시켰고,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이 기지를 세웠다고 한다. 1905년 5월 27일에 쓰시마 해전이 이 근처에서 벌어졌는데, 당시에 오키쓰 궁에 있던 신관 佐藤市五郎(사토 이치고로?)가 이 해전을 생생히 목격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무나카타 대사에서는 매년 5월 27일을 다고리히메 여신의 축제일로 정했다. 다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하사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유인 듯하다.(확인해보지는 않았다.) 5월 27일이면 선발된 남자 200명 남짓 정도 오키노시마로 입도하여 축제를 거행한다. 그런데 오키노시마가 신체이므로 그냥 들어가지는 못하고 며칠 전부터 신사 참배부터 한 뒤에 오키노시마 앞 바다에서 목욕재계하여 부정을 없앤 뒤에야 비로소 오키노시마 땅을 밟을 수 있다. 오키노시마가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관계로 흙 한줌조차 들고 나올 수 없다. 


오키노시마 근처에는 다른 섬이 없다. 그래서 오키노시마 남서쪽 해안에 작은 항만시설이 마련돼 있다. 지나가던 선박이 날씨 문제로 항해를 계속하기 어려울 때 이곳으로 피난하란 것이다. 하지만 섬 쪽에 통보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고, 목욕재계를 한 뒤에야 섬에 들어올 수가 있다. 한국인 선박을 위한 경고판도 여기에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 줄씩 교대로 쓰여 있는데, 한국어 부분만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한국 어선원 여러분 에게. 

 1. 한국 어선원의 상륙을 금지한다. 

   무단 상륙한 경우 에는 처벌한다. 

 2. 물, 식량, 기타물품을 가지고 나가는것을 금지한다. 

 3. 날씨가 회복 되면 즉시 출항 할것. 

 후꾸오까 해상보안부. 


어디 한국인에게 교정 좀 받지. 


오키노시마에 대한 글을 보면 흔히 오키쓰 궁에 있는 신관 한 명만 있는 듯 착각하기 쉽지만, 항만시설에는 신관 아닌 사람, 어부 등도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항만시설 바깥에는 신관 한 명 말고는 다른 사람이 전혀 없지만. 


195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유물이 나왔다. 스물 세 곳에서 4~10세기 무렵의 왕릉급 유물이 8만 점이나 쏟아져나온 것이다. 이중 6만 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무나카타 대사에서 보관 중이다. 대사 측은 '신보관'이라는 건물을 따로 세워 거기에서 대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쓰시마 섬에서 발굴된 비슷한 시기의 유물 전체를 합쳐도 오키노시마에서 발굴된 양에 감히 비하지 못한다고 하여,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오키쓰 궁은 오키노시마 남서쪽 해안 가까운 산 골짜기에 있다. 이 골짜기를 따라 20 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는데, 이 골짜기에서, 특히 거암(巨巖) 근처에서 유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위치를 보면 오키쓰 궁을 지은 위치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일부러 이 바위들이 있는 골짜기 끄트머리를 터로 잡았을 것이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부산 - 쓰시마 섬 - 이키 섬(壱岐島) - 일본 규슈

부산 - 쓰시마 섬 - 오키노시마 - 무나카타 - 세토 내해 - 일본 긴키

비록 지금은 오키노시마가 다고리히메의 신체라 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아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제사 유적이 10세기 것까지 있다고 하니, 아마 10세기 쯤부터 오키노시마를 신의 섬이라 하며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어부들이 어로생활을 하던 흔적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오키쓰 궁이 있는 골짜기의 거암 근처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은 시기별로 4단계로 구분한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암상(岩上)제사. 

거암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암상제사라 부른다. 큼직큼직한 바위에 신이 깃든다 하며 바위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 바위 윗부분 가운데에 큰 돌을 놓고, 주변을 작은 돌로 네모나게 둘렀다. 가운데 있는 돌이 제단이며, 작은 돌들이 경계선일 것이다. 주변에 비쭈기나무를 세우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있다. 중국에서 만든 금속 거울, 옥 장신구, 무기 등이 출토되었다. 일본 긴나이 지방에 있는 큰 고분에서도 비슷한 금속 거울이 나왔기 때문에, 일본 야마토 조정이나, 최소한 지방 호족이 제사를 거행한 것으로 추정한다. 호족이 지냈다면 아마도 무나카타 씨가 했을 것이다. 또한 신라나 가야에서 만든 덩이쇠도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을 묻음은 신에게 예물을 바치려는 것이다. 


5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암음(岩蔭)제사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이 직접 바위에 깃들지 않고 그 아래에 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곳도 바위 위가 아니라 바위 아래가 되었다.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바위 아래 그늘진 곳, 혹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에 제사를 지내고 유물을 묻었다. 특히 이 시기 유물에는 신라 왕릉에도 부장된 금반지, 유리제품, 금동 마구가 출토됐다.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고급품들이었다. 물론 일본 고분에서 나오는 일본식 부장품도 함께 나왔다. 페르시아 근처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유리 그릇도 발굴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 반암음 반노천제사 

암음에서 하기도 하고 노천에서 하기도 한다고 '반암음 반노천'이다. 일본산 유물은 금속품과 토기가 나왔고, 외국산은 중국 당삼채, 금동 용두가 나왔다.  


8세기부터 10세기 초반까지 노천제사 

골짜기 내 편평한 땅에 네모나게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유물로는 돌 제품과 토기가 나왔다. 


앞에서 다고리히메 등 세 여신에 대한 신화를 언급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이 세 여신은 무나카타 지방의 토착신이며 나중에 야마토 조정에 포섭되었다. 5세기 전반에 호족 무나카타 씨가 한반도 남부와 일본간 철 교역에 관여하면서 힘이 부쩍 강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와 왜국은 5-6세기에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왜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신라의 최고급 유물이 오키노시마에 묻힐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계 유물이 '전리품'일 거라고 점치는 모양이다. 왜가 신라를 공격해서 고급품을 들고 일본에 왔고, 신에게 예물로 이를 바쳤으리란 것이다.


동아대 박광춘 교수는 여기에 대해 좀 다른 주장을 한다. 6세기부터 삼국사기에서 왜 관 사라지고, 신라는 가야를 병합한다. 이에 야마토 조정은 가야를 도우려 병력을 보내려고 했지만, 이는 규슈 지방 호족들에게 부담이 되어 반란을 시도했다. 그리고 무나카타 씨도 여기에 합류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라는 규슈 지방 호족들이 가야를 돕지 못하도록 선물을 보내며 동맹을 시도했을 것이고, 오키노시마에서 양측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동맹을 맺었으리란 것이다. 6세기부터 신라나 한반도 쪽 유물이 사라지고 외국산으로는 중국 것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제사라고 보기엔 예물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10세기까지 오키노시마에서 지낸 제사가 역시 '다고리히메'에게 바친 것인지는 내가 읽은 자료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박광춘 교수는 '용왕'이라고 말하는데, 박 교수와 관심사항은 '한반도산 유물'이지 제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넘긴 것 같다. 나는 용왕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용왕이라면 바다의 신이라는 이야기인데, 바다의 신이라면 바닷가 근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오키노시마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전진기지 노릇도 했다고 하니, 이 섬에 있는 신이 인근 바다도 함께 다스린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신을 무나카타 씨가 자기네 신으로 포섭(?)했을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무나카타 씨가 이 섬의 신을 자기네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기네 신이라며 연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반대로 자기네가 원래 받들던 신들 있었는데, 이 섬에 있는 신이 바로 자기네 신들 중 한 분과 같은 분이라며 동일화를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더러 한 쪽을 고르라면 후자에 걸고 싶다. 물론 나는 일본어 자료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므로 근거조차 제대로 댈 수 없다. 하지만 논문 쓸 것도 아니고 내가 학자도 아니니, 그냥 적당히 넘어간다. (_____)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27




태평광기에서 인용한 이야기 중에 무척 재미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반언이란 사람이 쌍륙이란 놀이를 무척 좋아해서 어디 나갈 때면 늘 몸에 쌍륙판과 주사위 두 개를 챙겨갔다고 한다. 한번은 반언이 예의 쌍륙판과 주사위를 지닌 채 배를 탔는데 큰물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반언은 물에 빠져 가까스로 판자 하나를 잡았는데, 오른손으로 판자를 잡고 왼손으로 쌍륙판을 들고, 입으로는 주사위를 머금고 꼬박 하루 밤낮 파도에 떠밀려다녔다. 가까스로 뭍으로 흘러들어왔을 무렵 살이 상해서 손에 뼈가 보일 지경이었지만, 쌍륙판을 놓지 않았고 주사위도 뱉지 않은 채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쌍륙을 좋아하기가 괴벽이라 할 만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내내 유쾌했다. 좋게 말해야 괴짜일 터이나 난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역사/사회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어판 알레이스터 크롤리 전기  (0) 2013.07.02
신의 섬, 오키노시마 이야기  (1) 2013.06.30
나라란?  (0) 2013.06.30
아날로그를 되돌아보며  (0) 2013.06.30
이수현 씨를 생각하며  (0) 2013.06.30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09




옛날 옛날에 신심 깊다는 G군과 머리 좋다는 T군이 싸웠다. 


G군: 하느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신다구요? ㅋㅋㅋ 그거 뭔 부조리한 헛소리임? 하느님은 지극정성으로 금욕하지 않으면 모조리 불지옥 크리, ㄲㄲㄲ 나처럼 정결하게 살으3 


 T군: 아 ㅆㅂ 이 정줄놓아, 부조리라고 할 만큼 사랑이 넘친 분이니까 믿을 만하다는 거다. 


나중에 T군이 한 말은 "믿음이란 부조리하니까 믿어야 한다"로 잘못 알려졌다.

'전례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금요일 예식, 반유대주의  (0) 2013.09.29
성만찬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  (2) 2013.07.26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0) 2013.07.19
예수님의 고통  (0) 2013.07.19
아나포라 제4 양식  (0) 2013.06.30
      전례사/교회사  |  2013. 6. 30. 18:07




대한제국 말 조선을 생각하다가 문뜩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다. "만약 합병되어서 정말로 피합병국 백성들이 질적으로 훨씬 나아진다면, 그러한 경우에도 독립을 주장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도 답하지 못했다. 뭔가 이건 아니란 느낌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답하겠다.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피합병국 사람들이 원한다면 가능하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국가는 중요한 가치덕목이지만 최상의 가치덕목은 아니다. 하느님을 제외한다면, 나에게 있어 최상의 가치덕목은 사람이다. 만약 국가가 사람을 억압한다면 국가를 부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가정이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단 점이다. 피합병국이 합병주도국과 완전히 동등하고 평등하게 일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특히나 천수백 년 전의 역사를 들먹여 민족을 구분하려고까지 하는 무지막지한 경우가 횡행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낮다. 국가 역시 완전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은데 (국가 없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소수민족을 보라) 기존의 어떤 국가를, 개혁이 아니라, 컴퓨터 포멧하듯이 리셋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경우가 세상에 얼마나 나오겠나? 물론 지금껏 여러 나라가 명멸했지만 그중 나라가 정말 너무 개판이라 기본부터 리셋한 경우는 얼마 없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규정이 참 힘들다. 난 그냥 사람이라고만 했지만 계급이란 하위개념을 두면 이야기가 골치 아파진다. 그래서 난 이쪽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05




언제나 하늘을 머리 위에 지고 살지만, 대개는 하늘을 잊고 산다. 하늘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햇살 좋은 날, 때때로 운동장 가에 앉아 있으면 하늘을 바라본다. 그 푸른 빛깔이 얼마나 깊은지 하늘빛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꼭 하늘만 잊고 살지 않는다. 민들레 몇 송이가 길가에 피었다. 개미들이 흙바닥에 굴을 팠다. 늘 보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뿐일까,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숨을 죽이고 있으면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 바람이 윙윙 지나가는 소리, 자동차가 씽씽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몸이 뻐근했다. 아직 내릴 때 아니건만 일부러 내렸다. 집까지라고 해 봐도 이삼십 분 거리, 그냥 걷고 싶었다. 발이 땅을 디디는 감촉이 좋았다. 늘 버스를 탄 채 오가는 거리라 잘 안다 싶었다. 하지만 천천히 걷고 있으니 꼭 내가 모르는 곳에 온 기분이 들었다. 작은 골목이 내가 모르는 곳에 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다. 도로 바닥에 기묘한 벽돌을 깔았다. 다리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전자 기기들이 참 많다. 컴퓨터는 얼마나 복잡한지 부품을 조합하는 문제만으로도 머리를 굴려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쯤 되어야 기계 축에 들지는 앉는 법, 손목시계 안에도 기계의 묘미가 들었다. 손목시계 중에서도 디지털시계에는 그런 맛이 없다. 초침, 분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시계라야 기계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날로그시계 중에도 가격이 백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있다. 보석으로 장식한 예물 시계는 그런 시계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런 시계는 보석 값이지 시계 값이 아니다. 정말 좋은 시계는 따로 있다. 문자판은 시간을 알아보기에 좋고 분침은 정확하다. 이런 시계엔 쓸데없이 장식하지 않는다. 때때로 시계 뒷면에, 혹은 시계 문자판에 제작자들이 고유 상징을 넣기라도 하면 시계가 으쓱대는 듯하다. 그런 시계는 뒷면을 열면 벌써 부속들의 움직임부터 다르다. 문자판 안에 하늘이 담겼다. 디지털은 분명 정확하다. 게다가 정확성에 비해 돈도 얼마 들지 않으니, 아날로그 따위 구닥다리와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도 땅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사는 짐승이라서 그럴까, 모니터로 글을 읽기보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책을 읽는 편이 좋고, 깨끗하게 정자로 인쇄한 종이를 받기보다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편이 기쁘다. 손으로 비뚜름하게 쓴 글씨가 더 따뜻하다. 느낌이 핏줄을 타고 가슴 안에 쌓인다. 머리로 아는 것과 다르다. 내가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한 사연은 보잘 것 없다. 영어 공부가 어찌나 보람이 없던지 홧김에 에스페란토를 떠올리고 일을 벌였다. 그렇게 시작해 놓고 또록또록 눈을 떴다. 에스페란토를 가지고 책을 읽고 이메일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라면 무언가 아쉽다. 에스페란토로 무언가 이문을 남길 궁리만 한다면 칙칙하고 궁상맞다.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나랑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통이 아주 다른 곳에서 자란 사람과 접촉하여 교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넓이는 인식하는 만큼이다. 좁게 인식한다면 세상이 좁고, 넓게 인식한다면 세상이 넓다. 여행사에서 해외 여행을 알선하되 명승고적을 둘러보는 일정을 패키지 상품으로 엮어 내놓는다. 거기에 만족한다면 아깝고 아쉽다. 타국의 산천을 걷고 그곳 날씨에 허덕이고 그곳 사람들과 부대끼고 그곳 전통을 겪어 볼 수 있다면, 내 가슴 한구석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채우게 되지 않겠는가. 즐겁고 가슴 떨린다. 아날로그는 낭만이면서 망원경이라, 인식하는 폭을 넓힌다.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걸으니 사람들이 괴짜라고 부르지만, 이처럼 유용한데 어쩌겠는가? 그저 따를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역사/사회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어판 알레이스터 크롤리 전기  (0) 2013.07.02
신의 섬, 오키노시마 이야기  (1) 2013.06.30
태평광기를 읽다가 크게 웃었다.  (0) 2013.06.30
나라란?  (0) 2013.06.30
이수현 씨를 생각하며  (0) 2013.06.30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04




2001년 1월,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가 일본 도쿄에서 지하철 철길로 떨어진 사람을 구하겠다고 뛰어들었다가 제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철에 치여 유명을 달리했다. 그 일이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크게 보도돼 사람들 마음을 뒤흔들었다. 당시 이수현 씨 홈페이지에 접속했더니 숱한 사람들이 몰려와 추도사를 남겼는데, 그중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글이 상당수 있었다. 그때는 아직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이상하게 여겼다.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심지어 미국의 어떤 백인우월주의단체는  '멕시코 놈들은 콩을 먹는다'라는 이유도 댄다고 한다. 콩을 먹는다는 것조차 미워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정확히는 싫어하니까 미워하는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댄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도우려고 할 때는 이유가 필요없다. 사람이니까, 단지 그 이유만이면 족하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살리려다가 죽은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려다 죽은 사건이다.  하느님께서 국적을 따지실 리가 없다. 태평광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고승에게 젊은 승려가 법어를 청했다. 그러자 고승이 답하기를 "악한 일은 애써 피하고 선한 일은 힘써 행하라"라고 하였다.  젊은 승려가 실망하여 "누구나 아는 말일진데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고승이 답하여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백 살 먹은 노인도 행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옳은 일을 하려다가 죽었는데,  여기에는 오직 '사람'이 있을 뿐이다. 

(2008-10-08)

'역사/사회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어판 알레이스터 크롤리 전기  (0) 2013.07.02
신의 섬, 오키노시마 이야기  (1) 2013.06.30
태평광기를 읽다가 크게 웃었다.  (0) 2013.06.30
나라란?  (0) 2013.06.30
아날로그를 되돌아보며  (0) 2013.06.30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2:48




천주교 미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성경 말씀을 읽고 듣는 말씀전례와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전례가 그 둘이다.  이중 중심은 성찬전례에 있으며, 1970년 전례개혁 이전까지는 성찬전례만을 강조하고 말씀전례를 홀대함이 너무 지나쳐서 1년 내내 미사 중에 성경을 읽는 부분보다 안 읽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았으며,  중요한 부분을 읽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구약의 경우 대부분 안 읽었다고 한다.  전례개혁 이후 말씀전례를 대폭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성찬전례를 덜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중히 여길 뿐이다. 


성찬전례 때 먼저 성부께 지극히 감사기도를 드리며,  성령이 임하시기를 청한 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셨던 행동을 말씀을 재현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정통성을 지킬 수만 있다면 사제가 자유로이 기도문을 창작하여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도문을 중요하게 여긴 관계로 점차 기도문을 고정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양식은 전례마다 서로 다르지만 기본구조는 모두 비슷하다.  비잔틴 전례를 포함한 동방전례(동로마 지역에 있는 교회가 발전시킨 전례양식)에서는 성찬전례 기도문이 여럿이다.  세 개가 있는 곳이 있고,  네 개가 있는 곳도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서른 개가 있기도 한단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어떤 기도문을 쓰고,  특별한 날에는 어떤 기도문을 쓰는지 지정해두었다.  이 성찬전례 기도문을 그리스어로 '아나포라'라고 부르는데,  나 또한 이 말을 즐겨 쓴다.  아나포라를 '감사기도'라고도 번역하지만, 혼동할 여지가 많아 잘 쓰지 않는다. 


서방전례, 특히 로마 전례는 아나포라가 단 하나만 있었다.  동방전례가 여러 가지 아나포라를 돌려 쓰는데 반해,  로마 전례는 365일 내내 한 가지 아나포라만 사용했다.  이 아나포라를 '로마 전문'이라고도 부른다.  로마 전례에서는 아나포라가 하나인 대신, 아나포라 중 맨 앞에 있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부분(감사송)이 매우 발달하여 언제 어느 감사송을 쓸지를 지정해두었다.  감사송이 많을 때는 거의 매일 그 날의 고유한 감사송이 있었다는데,  쓸데없이 감사송이 많다 보니 내용이 엉망인 것도 많아서 나중에 교회가 대폭 줄였다.  고유한 감사송이 없는 날은 집전자 마음에 따라 적당한 감사송을 골라 쓸 수 있다. 


1970년 전례개혁 때 이러한 로마 전례의 특성을 대폭 바꾸었다.  처음에는 로마 전문을 대폭 개정할 생각이었지만,  전통을 존중하여 로마 전문은 최소한으로만 바꾸고 그대로 내두었다. 그 대신 다른 아나포라를 세 개 더 추가하고,  그 외에도 특수상황에서 쓸 수 있는 아나포라를 따로 추가했다.  로마 전문은 제1양식이라고 부른다.  추가된 세 양식은 제2, 제3, 제4 양식이라고 부른다.  제2양식은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에 나오는 아나포라 요약문을 수정했는데 매우 간단하며, 아나포라 기도문의 중요부분만을 요약하여 제시했다.  요약인 만큼 길이가 짧아서 오늘날 사제들이 매우 즐겨 사용한다.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다.  제3양식은 바가지니란 전례학자가 제시한 기도문을 참고했는데,  로마 전례의 전통을 대폭 반영하여 '수정 로마전문'이라고까지 불린다.  그러면서도 로마 전문의 단점을 보완하여 매우 완성도 있고, 특히 주일 미사 때 적합하다.  


아나포라 제4양식은 매우 특이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나포라 제4양식은 동방전례에 속하는 안티오키아 전례에서 사용하는 아나포라를 모범으로 삼아 내용을 줄이고 라틴어로 번역하고 수정한 기도문이다.  그러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제1양식부터 제3양식까지는 모두 로마 전례의 전통에 따라 감사송을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제4양식은 동방전례를 따랐기 때문에 감사송 부분을 바꾸지 못한다.  아나포라 전체가 하나로 된 '통짜 기도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감사송을 사용해야 될 날에는 제4양식을 쓸 수가 없다.  제한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기도문의 앞뒤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가장 유기적이다.  그뿐 아니라 동방전례의 특징이 반영되어 기도문이 매우 문학적이고 장엄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냥하다.  


제1양식(로마전문)에서는 이런 부분이 있다.  

"먼저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위하여 이 예물을 바치오니 (중략)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보편 신앙을 오롯이 받드는 모든 이를 돌보시어...(하략)"


아나포라 기도문이 은총받기를 기원하는 대상이 가톨릭 신자만으로 한정돼 있다.  이런 점을 인식하여 2,3 양식에서는 가톨릭 교회만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도 은총을 청한다.  하지만 제4양식은 정말로  상냥하게 모두를 위해 기원한다. 


"주님, 저희가 이 제물을 바치며 기억하는 이들을 모두 생각하여 주소서. 특히 주님의 일꾼, 교황 (    )와 저희 주교 (   )와 세계의 모든 주교와 성직자와 이 제사를 봉헌하는 이와 여기 모인 이들, 그리고 주님의 온 백성과 진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도 모두 생각하여 주소서. 또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잠든 교우들과 주님만이 그 믿음을 아시는 죽은 이들도 모두 생각하소서"


 진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  주님많이 그 믿음을 아시는 죽은 이.   이는 비그리스도교 신자까지도 염두에 둔 따뜻하고 상냥한 구절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아나포라를 읽다가 정말로 상냥한 구절이라고 그 구절만 거듭 읽었다.  또한 하느님을 찬양하는 부분은 실로 장엄하여 그 분위기가 다른 아나포라와 다르다. 


"아버지 홀로 살아계신 참 하느님이시고 영원으로부터 무궁히 계시며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머무시나이다. 또한 생명의 샘이시며 지선하신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어 온갖 복을 가득히 내려주시고 밝은 빛으로 기쁨을 주시나이다."


예로 든 구절이 이 정도다.  신자들 대다수가 제2양식에 익숙한데,  제2양식에서는 이러한 문학적 묘사가 없다 (당연하다.  원래 요약적인 기도문이니까) .    하지만 이 기도문은 특별한 감사송이 있는 날에는 쓸 수 없거니와,  길이가 가장 길어서 사제조차도 별로 쓰지 않는다.  나도 이 아나포라를 미사 중에 실제로 들어보기는 딱 한 번이었다.  아깝다. 

'전례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금요일 예식, 반유대주의  (0) 2013.09.29
성만찬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  (2) 2013.07.26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0) 2013.07.19
예수님의 고통  (0) 2013.07.19
그런저런 이야기  (0) 2013.06.30
      전례사/교회사  |  2013. 6. 30. 12:44




티몰스 님께 받은 초대장으로 오늘 처음으로 티스토리에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한 4년쯤 전에 처음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이글루스만 사용했지요.  제일 편했거든요.  1년인가 하다가 있던 블로그를 폭파한 뒤에 다시 이글루스에 블로그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거기가 지금 이 티스토리 블로그 바로 전에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글루스가 SK 산하였을 때에도 종종 운영에 문제가 있었죠.  2011년에 약관 바뀌고 어쩌고 하면서 여러 좋은 블로거들이 이글루스를 떠났습니다. 저도 그때 이글루스를 떠날까 고민해서 설치형 블로그도 알아보고 했지요. 그런데 제 컴퓨터 실력으로 설치형 블로그를 만들 수가 없더군요. 제 실력으로는 도쿠위키 설치형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데 설치형 블로그를 어떻게 만들겠나요?  그리고 이글루스의 장점인 밸리와 이웃 새글 보기의 매력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제-오늘,  드디어 이글루스가 마지막 선을 넘는군요.  SK에서 분리한 다음에 검색도 안 돼,  오류는 심심하면 나,  속 터지는 일이 많았죠.  그런데 이번에는 토요일부터 밸리 발행도 안 되고 이웃 새글 보기도 안 되는데,  운영진은 금요일에 칼퇴근하고 아무도 이글루스를 보지 않는지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가 없더군요. 월요일에나 겨우 상황을 파악하려나요?  제가 티스토리로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청운의 꿈(?)이 있었죠. 메이저 블로거가 되겠다고요.  하지만 좀 하다가 알았죠.  제 성격에 메이저 블로거는 무리입니다. 메이저가 되면 관리할 것도 많고 포스팅도 지속적으로 생산해야 해요.  그리고 메이저가 되면 어중이 떠중이들도 기어들어올 테고 싸울 일도 많겠죠.  그러면 즐거운 블로그 생활은 끝이죠.  블로그는 취미일 뿐 삶이 아니니까요. 


이글루스 블로그에 있던 글을 천천히 이곳으로 옮겨올 생각입니다.  최종적으로 모두 옮기면 이글루스 블로그는 댓글달기용 정도로나 쓰고 더 이상은 새로운 포스트를 쓰지 않고,  이 블로그에 새 글을 올릴 것입니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관에서 읽은 이야기  (4) 2013.09.02
푸념  (0) 2013.08.16
운명/밤샘 3차 애니화 관련으로 이야기해 봅니다.  (4) 2013.07.14
복자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결정  (0) 2013.07.08
도자기 잔  (0) 2013.07.07
      잡담  |  2013. 6. 30. 12:38



에스페로스's Blog is powered 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