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하늘을 머리 위에 지고 살지만, 대개는 하늘을 잊고 산다. 하늘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햇살 좋은 날, 때때로 운동장 가에 앉아 있으면 하늘을 바라본다. 그 푸른 빛깔이 얼마나 깊은지 하늘빛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꼭 하늘만 잊고 살지 않는다. 민들레 몇 송이가 길가에 피었다. 개미들이 흙바닥에 굴을 팠다. 늘 보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뿐일까,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숨을 죽이고 있으면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 바람이 윙윙 지나가는 소리, 자동차가 씽씽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몸이 뻐근했다. 아직 내릴 때 아니건만 일부러 내렸다. 집까지라고 해 봐도 이삼십 분 거리, 그냥 걷고 싶었다. 발이 땅을 디디는 감촉이 좋았다. 늘 버스를 탄 채 오가는 거리라 잘 안다 싶었다. 하지만 천천히 걷고 있으니 꼭 내가 모르는 곳에 온 기분이 들었다. 작은 골목이 내가 모르는 곳에 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다. 도로 바닥에 기묘한 벽돌을 깔았다. 다리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전자 기기들이 참 많다. 컴퓨터는 얼마나 복잡한지 부품을 조합하는 문제만으로도 머리를 굴려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쯤 되어야 기계 축에 들지는 앉는 법, 손목시계 안에도 기계의 묘미가 들었다. 손목시계 중에서도 디지털시계에는 그런 맛이 없다. 초침, 분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시계라야 기계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날로그시계 중에도 가격이 백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있다. 보석으로 장식한 예물 시계는 그런 시계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런 시계는 보석 값이지 시계 값이 아니다. 정말 좋은 시계는 따로 있다. 문자판은 시간을 알아보기에 좋고 분침은 정확하다. 이런 시계엔 쓸데없이 장식하지 않는다. 때때로 시계 뒷면에, 혹은 시계 문자판에 제작자들이 고유 상징을 넣기라도 하면 시계가 으쓱대는 듯하다. 그런 시계는 뒷면을 열면 벌써 부속들의 움직임부터 다르다. 문자판 안에 하늘이 담겼다. 디지털은 분명 정확하다. 게다가 정확성에 비해 돈도 얼마 들지 않으니, 아날로그 따위 구닥다리와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도 땅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사는 짐승이라서 그럴까, 모니터로 글을 읽기보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책을 읽는 편이 좋고, 깨끗하게 정자로 인쇄한 종이를 받기보다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편이 기쁘다. 손으로 비뚜름하게 쓴 글씨가 더 따뜻하다. 느낌이 핏줄을 타고 가슴 안에 쌓인다. 머리로 아는 것과 다르다. 내가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한 사연은 보잘 것 없다. 영어 공부가 어찌나 보람이 없던지 홧김에 에스페란토를 떠올리고 일을 벌였다. 그렇게 시작해 놓고 또록또록 눈을 떴다. 에스페란토를 가지고 책을 읽고 이메일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라면 무언가 아쉽다. 에스페란토로 무언가 이문을 남길 궁리만 한다면 칙칙하고 궁상맞다.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나랑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통이 아주 다른 곳에서 자란 사람과 접촉하여 교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넓이는 인식하는 만큼이다. 좁게 인식한다면 세상이 좁고, 넓게 인식한다면 세상이 넓다. 여행사에서 해외 여행을 알선하되 명승고적을 둘러보는 일정을 패키지 상품으로 엮어 내놓는다. 거기에 만족한다면 아깝고 아쉽다. 타국의 산천을 걷고 그곳 날씨에 허덕이고 그곳 사람들과 부대끼고 그곳 전통을 겪어 볼 수 있다면, 내 가슴 한구석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채우게 되지 않겠는가. 즐겁고 가슴 떨린다. 아날로그는 낭만이면서 망원경이라, 인식하는 폭을 넓힌다.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걸으니 사람들이 괴짜라고 부르지만, 이처럼 유용한데 어쩌겠는가? 그저 따를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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