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핀란드어에는 a와 ä로 표시되는 모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인 귀에는 그냥 '아'라는 거다. 핀란드인들에게 발음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ä는 '애'라고 말은 해주는데 핀란드인들이 실제로 말하는 중에 들어보면 그냥 '아'로 들린다. 나랑 내 동생이 핀란드어 지명을 읽을 땐 편의상 ä는 '애'라, y는 '위'라 간주하고 장모음은 전부 단모음으로 간주했다. 한국인이 발음하기 편하게 바꿔버린 거지만, 이 정도만 해도 현지인들에게 '나 어디로 간다' 같은 이야기를 할 땐 다들 알아들었으니까. 나중에 알고 지내는 언덕에게 들으니, 핀란드어를 배우는 소수의 (한국인도, 핀란드인도 아닌) 언덕들 사이에서도 a와 ä 구분은 지랄 같기로 유명한단다. ^^;;;
위배스퀼래(Jyväskylä), 그래, 이 지명도 한국인이 읽기 지랄 같다. 핀란드어 표기에서 J는 다른 유럽어의 로마자 표기 용례와 마찬가지로 반모음 /j/인데, 내 혓바닥 감각으로는 j와 y과 합쳐지면 뭐라고 발음해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위? 유이? 고민을 포기하고 그냥 위배스퀼래라고 읽고 있다. 아무튼 1월 4일쯤에 위배스퀼래市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레스티얘르비로 갔다. 위배스퀼래 버스 터미널에서 표 사려고 줄을 서니까 창구 여직원이 우릴 보고 긴장했다는 티가 팍팍 났다. 뭐랄까... "아이씨...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대화할 수 있을까?" 하는 듯한 느낌으로. 하지만 표를 끊는데 무슨 심오한 대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서로의 어설픈 영어로도 충분히 이야기가 됐다. 표 삯을 결재하느라 신분증이 필요하다기에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더니 잠시 멍하니 있다가 여직원이 물어보았다. 이거 생년월일 표시가 뭐냐고. 그래서 주민등록증 앞자리 숫자를 가리켰다. ^^;;
버스는 오전 11시 출발 예정이었다. 핀란드의 국민 초콜릿이라는 빠쪨 초콜릿이 성탄절 대목이 지났다고 떨이로 팔기에 한 통 샀다. 위배스퀼래에서 우릴 재워주었던 핀란드인 채식주의자 아저씨가 빠쪨이 참 맛이 좋다고 칭찬을 자자하게 해둔 터라 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몸도 당분이 그리웠고. 미리 버스에 타면서 기사에게 물었다.
"레스티얘르비?"
"예스"
의미를 풀면....
"우리 레스티얘르비 가니까 신경 좀 써 주셈..."
"알았어"
기사가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뚜, 뚜, 뚜, 뚜우우우우우 부릉부릉
동생이 중얼거렸다.
"11시에 칼출발이네."
버스가 가는 동안 도로에 차가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버스가 칼출발, 칼도착을 할 수 있었다. 래스티얘르비 정류장에 도착하니까 버스 기사가 우리에게 눈짓을 하더니 내려서 짐칸을 열어주었다. 나랑 동생도 따라 내려서 짐을 챙기는데, 레스티얘르비에서 우릴 재워주시기로 한 할머니가 뒤에 와서 인사를 했다. 우릴 알아보긴 아주 쉬웠다. 관광지도 아닌 곳까지 들어온 유색인종이 흔한 건 아니니까.
레스티얘르비는 북위 63도 30분에 있다. 태양의 위치랑 시간감각이 영 맞질 않았다. 태양의 위치를 보면 오전 8시쯤인 것 같은데 정오다. 당연히 낮은 짧다. 내가 갔을 때 낮이 하루에 5시간쯤인가 그랬으니.
내가 핀란드에서 딱 동짓날 도착해서 3주간 돌아다녔다. 이때 겨울밤이 너무 길어서 작년에 여행갈 때는 프랑스-스웨덴에 하지 무렵에 갔는데, 하지든 동지든, 낮이 너무 길든 밤이 너무 길든 몸 생채시간이랑 안 맞으면 힘들긴 매한가지임을 깨달았다.
우리 남매를 재워주기로 한 노부부는 점잖은 중산층 가정이었다. 할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뒤 통역사로 일하셨다고 했고 할머니는 교편을 잡았던 분이었다. 나중에 나랑 내 동생이 이야기했다.
"한국인이나 핀란드인이나 교사들은 말하는 어투가 다 똑같은가 봐."
도착한 첫날 할아버지가 나와 내 동생을 앞에 두고 일본어로 막 뭐라고 하기 시작했다. 이 할아버지, 일본어도 하시는가 싶어서 입을 딱 벌리니까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일본어를 배운 적은 없는데 부부끼리 일본에 여행 갔을 때 음식점에서 일본인 종업원이 하는 소리를 듣고 그거 따라한 거라고 했다. 그걸 한 번 듣고 아직까지 외우고 있단 밀이야? 하고 놀랐다. 어조와 발음까지 상당히 정확하게 따라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귀로는 구분이 안 될 만큼.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물었다.
"이 겨울에 핀란드에 뭐 볼 거 있다고 왔니? 밤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데."
"눈이랑 밤 보러 왔죠."
할아버지가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동생이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북유럽에도 겨울에 한 번은 가봐도 좋을 것 같아. 그때가 아니면 못 보는 게 있으니까.... 한 번만."
레스티얘르비 호수는 수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호수였다. 할아버지가 여기 둘레가 대략 15 km쯤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호수 안쪽에 작은 섬이 있는데 동네 주민들이 여름에 사용하는 별장들이 보였다. 섬뿐만 아니라 호수 둘레에도 별장이나 사우나장이 있는데, 여름이면 주민들이 사우나를 하다가 호수 물에 뛰어들어서 몸을 식히고 또 사우나장에 들어가고 한다나.
예전에 이 댁에 어느 케냐 여자가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살면서 '큰물'이라는 걸 본 적이 없던 터라 호수를 보자 옷을 벗고는 들어가서, 수영도 아니고 그냥 얕은 물에서 꿈뜰거리면서 "나 지금 수영하고 있어요!" 라고 하더라나. ^^;; 내가 갔을 땐 한겨울이라 호수가 꽝꽝 얼어 있었기 때문에 수영은 하지 못했다.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8시쯤에 일어났지만 밖은 새벽 3-4시인 것처럼 깜깜했다. 할머니는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식탁에 촛불만 켜 놓고 같이 밥을 먹었다. 할머니 말이 당신은 촛불을 워낙 좋아해서 이렇게 종종 켜놓지만, 할아버지가 그러다 불 난다고 싫어하기 때문에 젊었을 때에는 그걸로 많이도 싸웠다고 한다. ^^;; 실제로 핀란드에 머무는 동안 초나 촛대 장식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밤중에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 문간에 작은 초를 켜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불을 켜두냐고 물어보니까 핀란드 풍습인데, 겨울에 빛이 돌아오길 바라는 거라나. 가로등이 거의 없는 곳에서 집집마다 문간에 촛불을 켜둔 모습은 꽤 보기 좋았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실제로 초를 붙여 놓았음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알았다. 핀란드어로 크리스마드를 요울루라고 부르고, 여기 전통에도 산타클로스 비슷한 정령(?) 할아버지 같은 게 있다고 했다. 할머니 말로는 염소 할아버지라고 하던가 그런데, 수염을 염소처럼 길렀다고 그렇게 설명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 말이 예전에는 집안의 노인이나 마을 어른이 크리스마스 무렵에 이 염소 할배로 분장하고 기습적으로 애들 모인 곳으로 들어가서, "나쁜 애들이 누구냐! 벌을 주마, 벌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내가 기분 좋도록 노래를 불러라!"라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고, 애들은 놀래서 진짜로 노래를 불렀다나. ^^;; 다만 요새는 미국식 산타클로스의 영향을 받아서 예전과 달리 빨간 옷을 입고 점점 산타클로스 비슷하게 변해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