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혔다.  나는 한국 개신교계의 순교 담론 자체가 이상하고,  선교 담론은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보면 관람객들이 지나가는 통로 거울 밑에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일부러 순교자가 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문뜩 아래 글이 생각났다. 


"최근에 프리기아 지방에서 온 프리기아 출신의 퀸투스라는 사람이 맹수들을 보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자발적으로 순교하도록 부추긴 사람이었습니다. 전집정관은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기원제물을 바치도록 온갖 회유의 말로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스스로 (순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이와 같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부문헌총서 12,  "폴리카르푸스의 편지와 순교록" 중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번역을 인용. 원문은 서기 160년경쯤에 씐 것으로 추정됨.) 


선교를 하다 보면 순교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순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수가 좋은 학문활동을 함이 목적이어야지, SCI급 논문지에 실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듯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활동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아니,  "어둠만" 보여준 사례라고 정정하자. 


아프가니스탄 사건 관련으로 무슨 말이 있었나 글을 찾아보았다. 


홍기영, "2007년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 <<선교신학>> 19 (2008년): 159-188.


글쓴이는 나사렛 대학교 선교학 교수라 하였다.  상기 글에 대한 내 평가는 이거다. 


조선중앙통신 or 대본영 발표


실패도 아주 대실패한 사례를 소재로 하면서도 털끝만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어두운 부분을 철저하게 검열하여 썼다.  그래서 내가 조선중앙통신이거나 대본영 발표라고 하는 거다.  



"2007년 7월 19일은 한국교회가 잊지 못할 날이다. 분당에 소재한 샘물교회에서 파송한 단기선교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피랍된 날이다. 이날 우리 한국교회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당황하였으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국민들은 제발 무사히 모든 피랍된 선교단원들이 풀려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하였다."


"특히 타문화권 선교(cross-cultural missions)는 고되고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도 선교적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은 이 축복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수도 있다(계 2:5).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선교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1980년대 말 이래 경험하고 있는 침체 또는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하고 더욱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결코 하나님의 선교를 막을 수 없으며 앞으로 어떤 유사한 사태도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편협하고 독선적인 자세로 선교하는 것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선교형태를 또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샘물교회는 평화봉사단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다.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민족의 평화와 복지와 건강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간 것이다."


"샘물교회 담임목사는 “여러분이 볼모로 잡고 있는 그들은 여러분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저를 볼모로 잡을지언정 그들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한국교회도 그와 함께 기도해야 했다. 우리는 샘물교회를 위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샘물교회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했다. 오히려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곳에 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 것이 아닌가?"


"샘물교회에서 파송한 선교단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선교형태가 아니라 현지인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부터 시작하는 청취자 중심(audience-oriented)의 의료복지선교를 수행했다."


글쓴이가 철저히 검열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를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음이 은연 중에 드러나는 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샘물교회를 위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샘물교회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했다."



글쓴이가 말하는 '우리'란 개신교계다.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지"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전재한다.  이 글은 제목은 분석인 것처럼 썼으나 실상 분석이 아니다. 글쓴이에 따르면 샘물교회 선교단은 단 한 치의 잘못도 없었다.  아니,  실상 선교단마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만약 이 글을 본다면,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개신교에 대한 원성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차라리 연설문에 가깝다.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쳐 나가야 한다. 이런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다. 


글쓴이는 3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래서 나는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을 인용한 것이다. 



최우영,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 반개신교 담론의 기원과 해석", <<사회와 이론>> 14 (2009년): 313-351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최우영 교수가 쓴 위 논문은 조선중앙통신 같은 홍교수의 글과는 달리, 대놓고 그 어둠을 파헤치려고 한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2007년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반개신교 담론이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 종교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반개신교 담론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집합적인 양상으로, 그것도 매우 흥분된 형태로 분출되었다. 과거 정치권력에 의해 특정 종교가 비호나 박해를 받음으로써 여기에 대한 시시비비가 논의된 적은 있었지만(강인철, 2003; 박희승, 1995),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특정종교를 둘러싸고 긴장과 갈등이 이 정도로 불거져 나왔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표출된 반응은 개신교에 대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그래.  이 글이 오히려 상황을 직시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1년 전에 전초전이라 할 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2006년 3월, 인터콥 대표 최바울 목사가 8월 초에 아프가니스탄에 2천 명을 보내 평화축제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외교부도 바보가 아닌지라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2천 명을 보내겠다는 이 대담무쌍한 계획에 대경실색했다. 심지어 한기총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올 정도였지만,  최바울 목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1주일 예정이던 것을 3일 일정으로 줄이고,  7월 30일에 시작하려던 것을 8월 5일로 늦추었을 뿐이다.  아프간 정부도 "한국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통보했고,  이맘 500여 명이 모여 "한국인들이 선교하러 왔다" 하며 항의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만약 일정대로 진행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에 최바울 목사는 이 모든 소식에 대해 "사실무근이다.  한국 정부가 아프간 정부를 압박해서 있지도 않은 소식을 뿌린다" 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국 이미 입국했던 사람들이 추방되고 나서도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약간 이야기는 다른데,  2005년 통계청의 종교인구통계가 발표됐을 때에도 개신교계에서 작은 파란이 있었다. 개신교인 인구가 천만이 못될 뿐만 아니라,  그 전과 비교해서 오히려 숫자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때 몇몇 사람들은 "통계청이 자료를 조작한 줄 알았는데, 따로 알아보니 맞는 것 같더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통계청이 개신교인 인구수를 조작해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외교부가 (아무 문제 없는) 아프간 선교를 방해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최바울 목사가 이끄는 인터콥은 심지어 다른 개신교 선교단체와도 갈등이 많아서 결국 다른 단체들이 협력관계를 끊을 정도긴 했지만, 당시에 최바울 목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많았음은, 그리고 아마 지금도 꽤나 있음은 확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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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참 재미나단 생각이 든다.  고려에도 사직단이 있었는데 고려 사직단은 천자국 예법에 따라 사직단 각 단 길이를 5장으로 했다. 그런데 고려는 중국의 옛 예법을 엄밀히 따르지는 않았다. 중국 예법에 따르면 사직단 신위는 북향해야 하는데, 고려에서는  남향하도록 했다.  조선은 경복궁을 지은 뒤 종묘와 사직을  종묘를 만들었다. 종묘를  세움은 대작업이라 실록에 기록이 세세하게 남았지만 사직을 만듦은 별로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 실록에도 기록이 변변찮다.  (종묘와 사직단을 모두 가 보면, 사직을 세움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가슴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직은 대단히 중요했다. 흔히들 종묘사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종묘보다 사직이 위다. 국상을 맞아 종묘에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건만 사직에는 제사를 지낼 정도니 말이다.  종묘는 왕가 일원이 결속하는 자리지만, 사직은 왕을 중심으로 만백성이 결속하는 자리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빌어 풍요를 기원하는 곳이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면,  사직단이야말로 농사의 성지로 땅의 중심이다.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을 세웠다.  좌묘우사인데 왜 종묘가 동쪽,  사직이 서쪽인가? 옛 예법에는 군주를 북신, 즉 북극성에 비견하여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를 기준으로 좌우를 따지기 때문에 남향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진다.  경복궁에서 남향함을 기준으로 좌우를 따지니까 당연히 좌측이 동쪽, 우측이 서쪽이다. 



사직단 주변에 두 겹으로 담을 둘러쌓는데,  이 담을 유(壝)라고 부른다.  바깥쪽 유에는 동서남북으로 홍살문이 하나씩 있다. 유를 넘어서 들어가면 제단이 두 개가 있는데, 동쪽이 社단, 서쪽이 稷단이다. 사직단 내에서 방위를 정할 때는 실제 방위를 따지지 않는다.  사직단이 경복궁 서쪽에 있으므로, 사직단을 기준으로는 경복궁이 동쪽에 있다.  그러므로 경복궁을 향한 동쪽을 <의례상> 북쪽이라고 하고 방위를 정한다. 사단이 동쪽, 직단이 서쪽이라는 말도 경복궁쪽을 기준으로 삼아 한 말이므로, 실제방위를 따지면 사단이 남쪽, 직단이 북쪽이다. 이 글에서도 실제방위가 아닌 의례상 방위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설명한다. 



바깥쪽 유와 안쪽 유에는 모두 홍살문이 있다. (그러니까 모두 8개) 실제로 사직단에 가면 북쪽 홍살문이 정문인 줄 알기 쉽다.  홍살문 단이 3단이라 넓직해서 그렇다.  하지만 실제 정문은 서쪽 홍살문이다. 북쪽 홍살문은 신이 오는 방향이라 하여 3단으로 넓직하게 만들었을 뿐, 출입하기는 서쪽 홍살문으로 했기 때문이다. 북쪽 홍살문에서 서쪽 홍살문까지 네모난 돌을 깔아 길을 만들었는데, 유와 유 사이 공간만 지난다. 북쪽 홍살문과 사직단 가까운 곳에 돌을 도드라지게 쌓아 판위를 만들었다. 판위란 제사 때 왕이 서는 곳이다. 



바깥쪽 유의 북쪽에 있는 홍살문.  3단이다.



북쪽 홍살문 두 개를 비교한 것.

안쪽 유에 있는 홍살문은 1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문 사이에 있는, 왕이 서는 자리인 판위가 보인다.


조선의 예법으로는 사직단에 정월 신일申日에 기곡제祈穀祭를, 음력 2월과 8월 상순 무일戊日에 중삭제仲朔祭를, 납일臘日에 납향을 지냈다. 나라에 흉한 일이나 길한 일이 생겼을 때에도 이를 고하고자 제사를 지냈다.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납일은 동지 이후 3번째 무일을 뜻하는데 이는 조선 기준이다. 중국에서는 중삭도 2월과 8월 상순 술일戌日에 지냈고, 납일 또한 동지 후 세 번째 술일이었다. 납일에는 짐승을 사냥하여 바쳤다고 한다.  동의보감에 보면 납일에 눈이 내리면 이를 녹여 납설수臘雪水라 부르며 약에 쓴다고 한다. 




유에 둘러쌓인 사직단.  유가 둘임을 알 수 있다.



사직과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다른 제수와 함께 대뢰大牢를 바친다. 대뢰란 소, 양, 돼지를 제수로 함을 뜻한다.  소뢰小牢는 양과 돼지를 말한다. 대뢰를 바침은 천자국의 예법이요, 소뢰를 바침은 제후국의 예법이라는데  조선은 기꺼이 대뢰를 바쳤다. 원래는 종묘에만 대뢰를 바쳤다는데, 사직은 소뢰를 바치면서 종묘에는 대뢰를 바침은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사직에도 대뢰를 바치기로 예법을 바꾸었다. 대한제국 이전까지 조선의 예법은 제후국과 천자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고려 때에는 사직단이 5장이고 사직단의 신위도 태사太社, 태직太稷이었는데 이는 천자국 예이다. 조선은 제후국 예를 따라 사직단은 2장 5척으로 하고 신위도 국사國社, 국직國稷으로 했다. 그러면서도 제수는 대뢰를 바쳤다.  


사실 묘호를 씀도 천자국 예법이라는데 조선은 쓰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고려도 하던 원구단은 제후국이 천제를 지낼 수 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그런데 또 원구단을 폐지할 때도 반대의견도 상당해서, 이미 해동이 천 년도 전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단군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지 않았으므로 지속하자고 했다. 그리고 원구단을 폐지한 이후로도 조선국왕은 천제를 지내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했다.  이런 점을 보면 조선 사대부들이 성리학에 꽉 막혀서 조선을 어디까지나 제후국으로만 두고 자긍심을 가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중화식 세계관을 가졌음은 어쩔 수 없는 한계지만.



(대뢰에 대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송나라 때 책 태평광기를 보면 서민들도 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게 있으면 대뢰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병이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물을 떠다 놓고, 안 되면 소뢰를, 그래도 안 되면 대뢰를 바쳐 신에게 낫기를 기원했으며, 대뢰를 바치고도 낫지 않으면 운명이라 알고 체념했다고 한다. 또 지방의 어떤 사당에 신이 제사를 받되 대뢰를 제물로 쓰지 않으면 거들떠도 안 보는 바람에 고을 사람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뢰가 천자국의 예법이라는 말이 맞는가? 서민층에서는 규정된 예법을 지키지 않고 그저 정성에 정성을 들인다고 바칠 수 있다면 대뢰를 바친 게 아닌가 한다.)


사직단은 삼단으로 각변 가운데에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다. 사직단은 정사각꼴을 했다.  사직단의 안쪽은 붉은 흙으로 덮혔는데, 자료에 따르면 안쪽에는 오색토를 방위에 따라 깔고 그 위를 황토로 덮었을 뿐이라고 한다. 자료에는 황토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적토로 보인다.  사직단 중 동쪽에 있는 사단에는 남쪽에 돌 기둥이 박혀 있어, 흙 위로 15cm 정도 뚫고 나왔다. 지금은 사직단이 단도 두 개, 유도 두 장이다. 하지만 조선 초에는 단도 하나, 유도 한 장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명나라 홍무년간에 제정된 홍무례제를 기준으로 사직단을 만들었는데, 단이 (고려 때보다) 작아졌거니와 하나만 세우다 보니 제사를 지내기 불편했단다. 그래서 세종 때 박연이 주청하여, 홍무례제보다 더 오래된 예법을 참고하여 사단과 직단을 분리했다. 다른 신하가 주청하여 유도 하나 더 만들어, 지금처럼 단도 둘, 유도 둘이 되었다.  사직단을 서로 분리하기 이전, 단을 하나만 세운 시절에는 돌 기둥을 박아 돌기둥 왼편 오른면으로 국사신위와 국직신위를 각각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분리한 이후에는 지금처럼 사단과 국사신위,  직단에 국직신위를 모셨다. 



직단 위에서 찍은 사단 모습.  사단에 있는 석주가 보인다.



가까이에서 찍은 사단 석주.  단의 남쪽에 거의 붙어 있다.




사단에서 찍은 직단. 석주가 없다. 

 세종 때 양단으로 분리하면서

원래 있던 단을 사단으로 삼고 옆에 직단을 만든 듯하다.



사직단이 받드는 신은 누구인가?  후토后土와 후직后稷이다.  후토는 당연히 토지신이며 후직은 稷(기장 직)이라는 글자가 보여주듯 곡식신이다. 춘추좌전 소공昭公편 기록에,  社에는 구룡句龍을 배사하고 직稷에는 后稷을 배사하는데,  하나라 이전에는 공공씨의 아들 구룡을 사라 하고 열산烈山씨 아들 주柱를 직이라 하여,  은나라 이후부터 구룡과 후직을 함께 제사 지냈다고 한다. 아직 하나라는 역사시대라고 볼 수 없으므로, 춘추좌전 기록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옛 중국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정현鄭玄(127-200)은 예기에 주를 달아 사와 직을 오토신五土神과 오곡신五穀神으로 보는 자연신설을 주장했다.  왕숙旺肅은 정현과 달리 (춘추좌전 기록대로) 구룡과 후직으로 보는 인귀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후세 학자들은 예기 교특생 조에 정현이 주를 단 대로 자연신설을 따르는 편이란다.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단에는 국사신위와 후토신위를, 직단에는 국직신위와 후직신위, 총 네 위를 모신다. 이게 사와 직이 어떤 신인지에 대한 논란 때문에 몽땅 모신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 신인 국사/국직 신위 둘, 자연신인 후토/후직 신위 둘. 


바깥쪽 유 남서쪽 구석에 조그만 당이 하나 있는데 평상시에는 신위를 그곳에서 모신다. 제사 때에만 꺼내어 사직단 위에 젯상을 차리고 그 위에 모신다. 국사와 국직신위는 단 남쪽에 두어 북향하고, 후토와 후직신위는 단 서쪽에 두어 동향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한 3일 전부터 부정을 보지 않도록 근신하며, 단을 준비하고 신위를 준비한다. 왕이 미리 와서 인사도 드린다. 제사 당일이 되면 축시에 본격적인 제례를 시작하는데, 자시엔 하늘이 열리고 축시에는 땅이 열린다고 하므로 축시에 하는 듯하다. 뭐, 옛 관습에는 제사를 자정, 혹은 01시 무렵에 지냈다고 하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서쪽 홍살문으로 왕이 들어오는데,  초헌관은 왕, 아헌관은 세자, 종헌관은 영의정이 함이 기본이다.  물론 요즘 사직대제를 지낼 때는 그냥 정오에 거행한다. 



서문에서에서 북문을 바라보며, 유와 유 사이에서 찍음.  돌로 다음은 길이 얼핏 보인다.



판위를 가까이에서 찍었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연결된 길.  서문을 바라보며 찍음.  

신위를 모신 당이 화면 왼쪽에 보인다.

 

조선의 국가제례는 영신(신을 맞아들임), 전폐(폐백을 올림), 헌작(술잔을 세 번 올림), 음복수조, 망예(축문과 폐백을 태우거나 묻으며 제사를 끝냄)가 기본이다. 영신은 젯상을 차리고 깃털과 피를 예감(유와 유 사이에 있는 구덩이, 평상시엔 덮어서 안 보임)에 묻는 것이다. 이로써 신을 초청한다.  전폐례라 하여 폐백을 올리는데, 종묘제례에서는 푸른색 폐백을 올리는데 사직대제에서는 검은색 폐백을 올린다. 왕이 검은 폐백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뒤 사직단에 있는 네 신위에 각각 대뢰를 제물로 올린다. 이때 대뢰는 날것을 올리는데, 옛날에는 화식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한다. 종묘에서도 대뢰는 날것으로 올린다. (다른 제수는 제사 전에 이미 차려놓았음) 그 뒤 축을 읽고 네 신위에 술잔을 올려 초헌하는데, 아헌이나 종헌도 독축(축을 읽음)함을 제외하면 모두 초헌 떄와 같이 한다. 그뒤 왕이 따로 자리에서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제삿상에서 음식을 가져와 음복한다. 이러면 제기를 거둔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상에 차린 제기를 살짝 움직이는데 이를 철변두라 한다. 철변두한 뒤에는 축문과 폐백을 태워 예감에 묻고 왕이 환궁한다.  사직제사는 경사스러운 일이므로 궁에서 제삿상에 있던 음식을 문무백관과 함께 음복하며 잔치를 벌인다. 


제사를 지낼 때 종묘와 마찬가지로 사직용 음악과 춤이 있어서 이를 춘다.  대한제국 이전에는 육일무를 추었는데, 육일무에 동원되는 숫자가 얼마인지 조선에서도 말이 많았단다.  6X6으로 서른여섯 명이라는 주장과, 6X8로 마흔여덟 명이라는 주장이 맞섰는데 후자를 받아들였다. 마흔여덟이라고 해도 같은 조가 계속 춤을 추지 않고 곡마다 다른 조가 추므로 실제로는 그 2배, 3배 인원을 동원한다. 


고종이 칭제건원한 이후에는 천자국 예법에 따라 신위를 국사, 국직에서 태사, 태직으로 격상하고 육일무 대신 팔일무(64명이 정사각형으로 늘어서 춤을 춤)를 추게 했다. 그러나 순종 융희 2년에 의례에 제제가 들어가 1년에 사직제사를 두 번 거행하게 했다. (원구단엔 1번, 종묘에는 4번)  그 후에는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므로 사직제사를 거행한 적이 없다. 다만 지방의 사직단에서는 민중이 농사와 관련된 제사라 하여 자체적으로 거행했을 뿐이다.


1988년에 들어서야 올림픽에 맞추어 문화재를 복원하자는 생각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비로소 사직대제를 복원하여 거행했다. 그 이후에는 종로구청에서 후원하고 대동종약원에서 거행했으며, 지난 200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111호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사직제례를 복원함에 있어 춤이나 곡, 제수 음식에 대한 고증이 미비한 점이 있어 보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일무를 출 만한 인원이 기껏해야 국악학교나 국악원에서나 있는데, 대한제국 때처럼 각 일무를 맡을 조를 여럿 두지 못하고 한 조가 다른 춤을 모두 추도록 할 뿐이라 예전처럼 장염하지는 않다. 게다가 종묘는 그나마 공간이라도 제대로 있지, 사직단은 일제시대에 경내를 대폭 축소하고 남은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만한 인력이 모이기에도 비좁다. 여러 가지로 씁쓸하다. 

서문 밖에서 사직단을 바라보며 찍음. 유가 두 장임이 보인다.


<<원래는 2008/11/14 21:35에 올렸던 글이지만 시간을 바꾸어 다시 올려봅니다.>>

      전통제례  |  2013. 7. 19. 22:51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영어로 Leonine prayer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마 전례에서는 1970년 전례개혁 이전까지 평미사(노래하는 등 장엄예식이 없이 거행한 미사, 대개 평일에 미사드리거나 사제 혼자, 혹은 복사만 데리고 미사 드릴 때 이렇게 했다. 전례개혁 이전까지는 가장 흔한 미사 형태이고 했다.) 후에는 미사의 마무리 기도까지 모두 마치고도 몇 가지 추가적인 기도를 더 했다.  이 기도는 원칙적으로는 미사에 속하지 않지만 빼먹질 않았으므로 사실상 미사의 진정한 마지막 예식이었다. 


성모송 세 번

성모찬송경(Salve Regina)+교회를 위한 기도 (하나의 기도인데 전반부는 성모찬송경이고 후반부는 교회를 위한 기도로 구성돼 있다.)

미카엘 대천사께 드리는 기도 


이중 마지막 기도는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재위)가 환상을 본 뒤 작성한 기도로 유명하다.  레오 13세는 어느날 좌중이 있는 자리에서 기도 중에 느닷없이 환상을 보았는데, 악마가 하느님 앞에서 백 년만 시간을 준다면 교회를 유린할 수 있노라 장담했다는 내용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레오 13세는 특별히 미카엘 대천사에게 악마를 지옥으로 던져달라는 내용으로 기도문을 작성해서, 평미사를 마친 뒤 드리는 기도의 마지막에 덧붙였다.  레오 13세는 손수 이 기도를 작성했고 즐겨 바쳤다고 전해지는데, 후임 교황 비오 12세인가(기억이 가물) 이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 성심께 드리는 단원을 다시 덧붙였다.  이 기도는 꼭 미사 때가 아니더라도 바치면 3년 한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하지만 이 기도문 작성은 전례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악마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싶었던 레오 13세의 뜻과는 별개로, 미사라는 종교의례의 구조를 흐트러놓았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사가 마무리되면 정말로' 끝이 나야' 하는데, 원직적으로는 끝이 났는데도 다른 기도문이 덧붙여져 사실상 미사의 마무리 의식 노릇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그래서 있는 기도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판에 다른 기도를 덧붙였으니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기도는 1970년에 발표된 전례개혁 이전까지 평미사 후 마무리 기도로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이 기도문에 붙어 있던 한대사도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조치로 삭제되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3년 한대사라느니 300일 한대사라느니 하는 햇수를 없앴다. 한대사는 그냥 한대사일 뿐 다른 구분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와는 별개로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전히 교회를 위해서 이 기도를 가급적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매일 바쳐주기를 바랐다. 


Sancte Michael archangele, defende nos in praelio: contra nequitiam et insidias  diaboli esto praesidium.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 tuque, Princeps militiae caelestis, satanam aliosque spiritus malignos,  qui ad perditionem animarum pervagantur in mundo, divina virtute in infernum detrude, Amen.

(Cor Iesu sacratissimum, miserere nobis)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인 번역문은 이러하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 그리고 천상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번역문에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감금하소서.'라고 된 부분은 Imperet illi Deus, supplices deprecamur의 번역인데,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그자에게 명령하시기를 겸손되이 청하나이다" 정도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지 원문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각국어 번역판을 보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악마를 억제해 달라는 내용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번역하든 악마를 엿먹여 달리는 쪽으로 번역함은 다들 똑같다. 


나는 이 기도문을 보고 레오 13세가 환상을 보았단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별로 길지도 않은 기도문이 상당히 산만하게 작성됐다.  처음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기도하다가 중간에 하느님으로 대상이 바뀌어 한 문장, 그리고 다시 미카엘 대천사로 대상이 바뀐다. 


레오 13세 교황님은 잘 배운 지식인인데 별로 길지도 않은 기도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산만하다니, 이 기도문을 작성할 때 정말로 굉장히 심란했던 거라고 보고 있다. 

(2012/02/08 2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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