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어서 컴퓨터로 옮기기 귀찮아서 사진 없이 이야기하는데, 나는 도자기를 꽤나 좋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도 도자기 쪽에서 오래 머무르고, 고려청자 특별전시회를 열었을 때에도 거기에 갔다. 물론 내 주머니는 일반인 학생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좋은 도자기를 사거나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또 술을 좋아하다 보니 취향의 교집합으로 도자기 술잔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다. 


실제로 알아보면 '도자기 술잔'이라고 처음부터 파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이 술잔이라고 하면 유리 소주잔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본 음식점에서 사케라도 내놓을 때에야 비로소 도자기 '술잔'이 나오는 편인데, 문제는 거기 술잔은 내 취향이 아니란 점이다. 도자기 잔은 대부분 찻잔이다. 다구 세트의 일부로 잔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찻잔이라고 만들다 보니 술잔으로서는 좀 크다. 조금만 더 작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술을 조금 덜 따르는 수밖에. 


나는 다이소에서 도자기 찻잔을 사서 술잔으로 썼다. 왜 하필 다이소냐. 매장은 흔하고 상품은 싸니까. 우리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술잔을 챙기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아쉬운 대로 찻잔을 술잔 삼아 술을 마셨다. 그런데 점점 다이소 찻잔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유는 색깔. 옛날 도자기 유약 같은 색이 아니라 염료를 쓴 듯한 색이라 결국 내가 못 참고 새로 도자기 잔을 하나 사기로 했다. 고급스런 다구 세트로 사려면 비싸지만, 찻잔 하나만 살 경우에는 아무리 비싸도 만 원을 안 넘는다. 아니, 실질적으로는 5천 원을 안 넘는 것을 알고 좋아했다. 내가 본 찻잔 중에 4-5만원 하는 것도 있긴 했는데, 그건 안쪽을 금으로 도금해서 그런 거고. 도자기 값이 아니라 금 값이다. 


인사동에 가서 적당히 찻잔을 파는 데가 없나 뒤졌는데 고급 다구 세트를 파는 경우가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다. 결국 가게 하나를 찾아서 들어갔는데, 의외로 보다 보니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사기가 마음에 들어서 하나 샀다. 가격은 3천 원. 이만 하면 싸지. 도자기 표면에 유약이 거북이 껍질처럼 갈라진 것도 마음에 들고. 청화로 간단하게 그린 꽃도 마음에 들고. 


집에 와서 이 찻잔으로 술을 마셔봤는데 어라, 잔이 입에 닿는 느낌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다구를 도자기로 만드는가 보구나 싶었다. 가격 3천 원에서도 알 수 있듯, 절대 고급이 아니지만 내 마음에 딱 든다면 그게 고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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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진 지음, <미스터 크롤리: 대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롤리 평전>, 2003, 모자이크


맨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외국 책을 번역한 줄 알았다. 그런데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오컬티스트가 지은 책이었다.  책 앞날개에 씐 저자 약력에서는 1999년에 동방성당기사단(O.T.O)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름 적재적소의 인물이 크롤리 전기를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런데 책을 다 읽어보고 난 이후의 내 느낌은 


"내가 두 번 다시 오컬티스트가 쓴 책을 읽나 봐라."


................................................


이거, 전기물로서는 빵점이다.  알레이스터 크롤리란 인간의 행적보다는 오컬트 해설에만 노골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알레이스터가 유명한 오컬티스트인 만큼,  그이의 전기를 쓴다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오컬트에 대한 해설,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컬트적인 부분은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지만, 막상 행적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하고 간지가 나는 부분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알레이스터는 1934년에 영국에서 명예훼손으로 다른 사람을 고소하여 재판을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증인으로 올라온 사람 중에는 '베티 메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알레이스터의 마법 제자인 '라울 러브데이'의 아내였다. 베티 메이는 알레이스터가 기묘한 카리스마와 수행으로 남편이 죽게 했으며, 동물희생을 바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알레이스터는 그런 적 없으며 베티가 정신이상자라고,  자기는 오히려 인내와 사랑으로 보살폈다고 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직접 베티와 알레이스터가 각기 자서전에 쓴 바를 몇 장씩 인용하면서 길게 설명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역시 알레이스터 편을 들어 설명한다.  베티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을 넘기면 저자는 알레이스터 행적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알레이스터가 패소해서 돈을 물어야 했으며,  몇 년 뒤에는 파산신청까지 했다고 말이다. 


"결국 이렇게 전 재산을 날려버린 노년의 크롤리는 마법조직 동방성당기사단이 보내주는 연금만으로 생활하며 이 하숙집 저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194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


평색이 크롤리 일생만 다룬 평전이면서 재판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심지어 위키페디아보다도 설명이 부실하다.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종종 저자는 독자를 가르치려고 든다.  아무리 평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기인데,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가 복음서를 편집했고,  관련 증거를 없앴다는 주장에 이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알레이스터가 재판을 건 것에 대해서도 저자 스스로 인정하기를,  다른 전기 작가들은 대부분 알레이스터가 당시에 자금이 쪼달렸기 때문에 재판을 통해서 돈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마저도 오컬트적으로 주장한다.  알레이스터는 재판에서 질 줄 알았지만,  나자렛 예수가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 했듯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크롤리도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나자렛 예수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므로,  왜 현실시대의 인물인 크롤리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조작된' 신화적 인물인 예수를 따라야 했다고 주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겠지.  


아마 다른 작가라면 간단히만 설명하고 넘어갈 만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도 오컬트적인 부분을 소개하려고 길게 소개한다.  알레이스터과 황금새벽단에 있던 시절에 '문 차일드'라는 소설을 썼다는데,  이 소설에서 묘사된 마법 전투 이야기를 8쪽에 걸쳐 인용한다.  알레이스터가 자기 전생이라며 주장하는 내용도 10쪽 가까이 설명한다.  


알레이스터와 (아일렌드의 유명한 문인인)  예이츠가 똑같이 황금새벽단에 있었는데,  알레이스터는 예이츠가 악마적인 마법을 행하며,  예이츠가 자기의 시적 재능을 무섭게 질투했다고 주장한다.  앞서 이야기한 소설 문 차일드에서도 예이츠의 이름을 바꾼 사악한 마법사 '게이츠'가 선한 마법사들을 공격하다가 죽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예이츠가 정말로 그랬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잘해 봐야 예이츠가 알레이스터의 시적 재능을 질투했다는 부분에서 '알레이스터의 말이 사실이라면'이라고 부언하는 정도다. 


알레이스터는 자기 전생 중 하나가 저 유명한 막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알렉산데르 6세를 단순한 변태 교황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한다.  글세?  가톨릭 신자조차 옹호하길 포기한 교황사상 최악의 교황이?  만약 알레이스터가 저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역시 알렉산데르 6세를 기꺼이 '변태 교황'으로 보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 아는 지인이 말했다. 


"오컬티스트들은 종종 자기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아요."


나도 동의한다.


이 책을 보고 너무 답답해서 제대로 된 전기가 없을까 싶어서 아마존을 뒤져봤다. 전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대부분 오컬티스트들이 썼고,  오컬티스트가 아닌 사람이 쓴 전기는 (내가 본 바로는) 한 권밖에 없다. 물론 아마존 내에서는 별로 평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평을 남긴 사람들도 '중립적으로 쓰려고 한 게 보인다'라고 평가하니,  언젠가 사볼까 한다.  언젠가. 


덧붙임:  이 책을 보고 구글링해보는 중에  알레이스터가 사망한 마을 사람이라며 올린 글을 읽었는데,  자기 마을에서는 알레이스터가 죽으면서 마을을 저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랬다.  워낙 인물이 인물이다 보니 그런 전설이 생길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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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 동수도,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협이라고 부르는 곳에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카타(宗像)시에 속한다. 일본어로 오키(沖)란 말에 '먼 바다'란 뜻이 있다고 하니 오키노시마(沖ノ島)란 이름은 '바다 멀리 있는 섬'이란 뜻일 것이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에 따르면 면적이 약 0.97 제곱 킬로미터(약 29만 3천 평)이라고 하니 올림픽 공원의 3분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위치는 북위 34도 14분 39초, 동경 130도 6분 20초.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243.6 미터라고 한다. 


오키노시마는 면적은 좁지만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부산-쓰시마 섬 북쪽 곶-오키노시마가 거의 직선으로 이어진다. 부산에서 오키노시마까지 약 145 킬로미터, 오키노시마에서 무나카타시까지 약 60 킬로미터 정도 된다. 


오키노시마 자체가 다고리히메(田心姬) 여신의 신체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섬에는 여자는 무조건 상륙할 수가 없다. 섬 남서쪽 해안 가까이에 오키쓰 궁(沖津宮)이라는 신사가 있는데, 뭍에 있는 무나카타 대사에서 남자 신관 한 명을 파견하여 10일 간격으로 교대케 한다고 한다. 말은 궁이라고 하지만 신격이 높아 '궁'이라고 했을 뿐 규모가 크지는 않다. 남자 신관 단 한 명만 있는데 신사 규모가 크면 관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관은 매일 아침, 바닷물에서 목욕재계한 다음 길을 따라 산에 올라가 오키쓰 궁에서 정해진 대로 예식을 올린다. (겨울에는 목욕재계를 어떻게 할까?) 


일본 기기신화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쳐울다가 아버지 이자나기에게 쫓겨나자(____) 천계 다카마노하라에 올라가 누나인 아마테라스 여신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테라스는 자기 동생 스사노오가 자길 쫓아내고 천계의 군주가 되려는 줄 알고 급히 무장하고 마중(?)나갔다. 강변에서 서로 만났는데, 스사노오는 누나가 자기를 경계함을 깨닫고는 점을 쳐보자고 제의한다. 서로의 물건으로 신을 탄생케 하자. 만약 내가 결백하다면 내 물건에서는 여신이 나올 것이다. 


먼저 스사노오가 자기 검을 아마테라스에게 건냈다. 아마테라스가 검을 입에 넣고 씹어서 뱉자 여신 셋이 나왔다. 아마테라스가 곡옥을 건네자 스사노오가 이를 받아 씹어서 뱉었다. 그러자 남신 다섯이 나왔다. 스사노오가 처음 말했던 대로 스사노오의 검에서 여신 셋이 나왔으므로,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결백함을 인정하고 타카마노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여기서도 깽판을 치다가 결국 하계로 내쫓겼다. 


일본서기에서는 아마테라스가 숨결을 불어넣자 나왔다는 세 여신이 차례대로 다고리히메(田心姬), 다기쓰히메(湍津姫),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라고 한다. 고사기에서는 차례대로 다키리비메(多紀理毘売), 이치키시마히메(市寸島比売), 다기쓰히메(多岐都比売)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이 세 여신에게 천손을 돕고, 또한 천손에게 제사를 받으라 명했기로, 세 여신이 무나카타에 내려왔다고 한다. 오키노시마, 오노시마, 그리고 본토(?) 무나카타시에서 각각 이 세 여신을 모신다.


오키노시마는 쓰시마 섬을 제외한다면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섬 교통의 요지다. 다고리히메의 신체로 여긴다면서도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곳이므로 17세기에 (지금의 후쿠오카를 다스렸던) 구로다 번(黒田藩)에서 여기에 병력을 일부 주둔시켰고,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이 기지를 세웠다고 한다. 1905년 5월 27일에 쓰시마 해전이 이 근처에서 벌어졌는데, 당시에 오키쓰 궁에 있던 신관 佐藤市五郎(사토 이치고로?)가 이 해전을 생생히 목격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무나카타 대사에서는 매년 5월 27일을 다고리히메 여신의 축제일로 정했다. 다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하사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유인 듯하다.(확인해보지는 않았다.) 5월 27일이면 선발된 남자 200명 남짓 정도 오키노시마로 입도하여 축제를 거행한다. 그런데 오키노시마가 신체이므로 그냥 들어가지는 못하고 며칠 전부터 신사 참배부터 한 뒤에 오키노시마 앞 바다에서 목욕재계하여 부정을 없앤 뒤에야 비로소 오키노시마 땅을 밟을 수 있다. 오키노시마가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관계로 흙 한줌조차 들고 나올 수 없다. 


오키노시마 근처에는 다른 섬이 없다. 그래서 오키노시마 남서쪽 해안에 작은 항만시설이 마련돼 있다. 지나가던 선박이 날씨 문제로 항해를 계속하기 어려울 때 이곳으로 피난하란 것이다. 하지만 섬 쪽에 통보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고, 목욕재계를 한 뒤에야 섬에 들어올 수가 있다. 한국인 선박을 위한 경고판도 여기에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 줄씩 교대로 쓰여 있는데, 한국어 부분만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한국 어선원 여러분 에게. 

 1. 한국 어선원의 상륙을 금지한다. 

   무단 상륙한 경우 에는 처벌한다. 

 2. 물, 식량, 기타물품을 가지고 나가는것을 금지한다. 

 3. 날씨가 회복 되면 즉시 출항 할것. 

 후꾸오까 해상보안부. 


어디 한국인에게 교정 좀 받지. 


오키노시마에 대한 글을 보면 흔히 오키쓰 궁에 있는 신관 한 명만 있는 듯 착각하기 쉽지만, 항만시설에는 신관 아닌 사람, 어부 등도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항만시설 바깥에는 신관 한 명 말고는 다른 사람이 전혀 없지만. 


195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유물이 나왔다. 스물 세 곳에서 4~10세기 무렵의 왕릉급 유물이 8만 점이나 쏟아져나온 것이다. 이중 6만 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무나카타 대사에서 보관 중이다. 대사 측은 '신보관'이라는 건물을 따로 세워 거기에서 대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쓰시마 섬에서 발굴된 비슷한 시기의 유물 전체를 합쳐도 오키노시마에서 발굴된 양에 감히 비하지 못한다고 하여,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오키쓰 궁은 오키노시마 남서쪽 해안 가까운 산 골짜기에 있다. 이 골짜기를 따라 20 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는데, 이 골짜기에서, 특히 거암(巨巖) 근처에서 유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위치를 보면 오키쓰 궁을 지은 위치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일부러 이 바위들이 있는 골짜기 끄트머리를 터로 잡았을 것이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부산 - 쓰시마 섬 - 이키 섬(壱岐島) - 일본 규슈

부산 - 쓰시마 섬 - 오키노시마 - 무나카타 - 세토 내해 - 일본 긴키

비록 지금은 오키노시마가 다고리히메의 신체라 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아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제사 유적이 10세기 것까지 있다고 하니, 아마 10세기 쯤부터 오키노시마를 신의 섬이라 하며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어부들이 어로생활을 하던 흔적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오키쓰 궁이 있는 골짜기의 거암 근처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은 시기별로 4단계로 구분한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암상(岩上)제사. 

거암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암상제사라 부른다. 큼직큼직한 바위에 신이 깃든다 하며 바위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 바위 윗부분 가운데에 큰 돌을 놓고, 주변을 작은 돌로 네모나게 둘렀다. 가운데 있는 돌이 제단이며, 작은 돌들이 경계선일 것이다. 주변에 비쭈기나무를 세우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있다. 중국에서 만든 금속 거울, 옥 장신구, 무기 등이 출토되었다. 일본 긴나이 지방에 있는 큰 고분에서도 비슷한 금속 거울이 나왔기 때문에, 일본 야마토 조정이나, 최소한 지방 호족이 제사를 거행한 것으로 추정한다. 호족이 지냈다면 아마도 무나카타 씨가 했을 것이다. 또한 신라나 가야에서 만든 덩이쇠도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을 묻음은 신에게 예물을 바치려는 것이다. 


5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암음(岩蔭)제사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이 직접 바위에 깃들지 않고 그 아래에 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곳도 바위 위가 아니라 바위 아래가 되었다.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바위 아래 그늘진 곳, 혹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에 제사를 지내고 유물을 묻었다. 특히 이 시기 유물에는 신라 왕릉에도 부장된 금반지, 유리제품, 금동 마구가 출토됐다.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고급품들이었다. 물론 일본 고분에서 나오는 일본식 부장품도 함께 나왔다. 페르시아 근처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유리 그릇도 발굴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 반암음 반노천제사 

암음에서 하기도 하고 노천에서 하기도 한다고 '반암음 반노천'이다. 일본산 유물은 금속품과 토기가 나왔고, 외국산은 중국 당삼채, 금동 용두가 나왔다.  


8세기부터 10세기 초반까지 노천제사 

골짜기 내 편평한 땅에 네모나게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유물로는 돌 제품과 토기가 나왔다. 


앞에서 다고리히메 등 세 여신에 대한 신화를 언급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이 세 여신은 무나카타 지방의 토착신이며 나중에 야마토 조정에 포섭되었다. 5세기 전반에 호족 무나카타 씨가 한반도 남부와 일본간 철 교역에 관여하면서 힘이 부쩍 강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와 왜국은 5-6세기에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왜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신라의 최고급 유물이 오키노시마에 묻힐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계 유물이 '전리품'일 거라고 점치는 모양이다. 왜가 신라를 공격해서 고급품을 들고 일본에 왔고, 신에게 예물로 이를 바쳤으리란 것이다.


동아대 박광춘 교수는 여기에 대해 좀 다른 주장을 한다. 6세기부터 삼국사기에서 왜 관 사라지고, 신라는 가야를 병합한다. 이에 야마토 조정은 가야를 도우려 병력을 보내려고 했지만, 이는 규슈 지방 호족들에게 부담이 되어 반란을 시도했다. 그리고 무나카타 씨도 여기에 합류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라는 규슈 지방 호족들이 가야를 돕지 못하도록 선물을 보내며 동맹을 시도했을 것이고, 오키노시마에서 양측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동맹을 맺었으리란 것이다. 6세기부터 신라나 한반도 쪽 유물이 사라지고 외국산으로는 중국 것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제사라고 보기엔 예물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10세기까지 오키노시마에서 지낸 제사가 역시 '다고리히메'에게 바친 것인지는 내가 읽은 자료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박광춘 교수는 '용왕'이라고 말하는데, 박 교수와 관심사항은 '한반도산 유물'이지 제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넘긴 것 같다. 나는 용왕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용왕이라면 바다의 신이라는 이야기인데, 바다의 신이라면 바닷가 근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오키노시마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전진기지 노릇도 했다고 하니, 이 섬에 있는 신이 인근 바다도 함께 다스린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신을 무나카타 씨가 자기네 신으로 포섭(?)했을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무나카타 씨가 이 섬의 신을 자기네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기네 신이라며 연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반대로 자기네가 원래 받들던 신들 있었는데, 이 섬에 있는 신이 바로 자기네 신들 중 한 분과 같은 분이라며 동일화를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더러 한 쪽을 고르라면 후자에 걸고 싶다. 물론 나는 일본어 자료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므로 근거조차 제대로 댈 수 없다. 하지만 논문 쓸 것도 아니고 내가 학자도 아니니, 그냥 적당히 넘어간다. (_____)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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