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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 무나카타 3위신에 대한 일본서기 본문과 일서를 정리한 바 있다. 그런데 본문과 일서의 전승이 미묘한 부분에서 차이가 많아서,  최초의 전승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내가 이쪽으로는 지식이 없지만, 일단 일본서기 내의 기록만을 바탕으로,  내 나름대로 이야기의 원형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정한 원칙은 이러하다. 


1. 단순한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다.

2. 신화 내 캐릭터들의 성격이 일관된 쪽이 원형에 가깝다. 

3. 아마테라스 여신을 띄워주는 이야기는 원형과 멀다. 

4. 현실역사에서 후대의 사실이 전제되어야 이해되는 부분은 원형과 멀다. 



스사노오가 다카마노하라로 올라올 때 '하카루타마'라는 신이 스사노오에게 구슬을 바쳤다는 6-2의 요소는 1번과 2번에 근거해서 무시한다. 스사노오는 자발적으로 구슬을 바치려고 할 만한 순순한 신이 아니다. 게다가 '하카루타마'라는 이름 자체가 작위적이라 1번에 어긋난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천상의 강가에서 서로 대치하였을 때, 맹세하자는 말을 아마테라스가 꺼냈다는 6-1, 6-3의 요소는 2번과 3번에 근거해서 무시한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자기를 다치게 했을 때에도 동굴에 스스로 들어갈 정도로 소극적이며,  유명한 천손강림 전승에서도 아마테라스가 주도하는 전승은 후대의 것이다.  또한 스사노오는 난폭하며 할 말은 하고 사는(___) 신이므로,  주도적인 역할을 스사노오가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맹세를 할 때에 서로 물건을 바꾸었다는 6-0, 6-2의 전승은 1번에 근거하여 무시한다.


아마테라스가 맹세할 때에 스사노오에게 "네가 남신을 낳는다면 그 아이가 하늘을 다스리게 하겠다."라고 말했다는 6-3의 전승은 1번과 2번에 근거하여 무시한다. 아마테라스가 자기 말고 다른 신이 하늘을 지배하게 한다는 이야기는 성격에 맞지 않으며,  또한 이야기 자체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요소다. 


스사노오가 구슬을,  아마테라스가 검을 씹어서 신을 낳았다는 6-0, 6-1, 6-3의 전승은 4번 원칙을 깨고 무시한다. 무나카타 3여신이 아마테라스에게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이미 무나카타 씨가 야마토 조정에 포섭된 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슬이 검보다 더 '고귀한' 상징인데,  스사노오가 낳은 5위 남신보다는 아마테라스가 낳은 3위 여신을, 일본서기에서 더 많이 신경 쓴다. 그러므로 6-2 전승과 마찬가지로 아마테라스가 구슬을 씹었다는 이야기를 원형에 가깝다고 본다. 


스사노오가 낳았다는 신은 5위가 맞을 것이다. 6위라는 일본서기 6-3의 전승을 무시한다. (애당초 6-3의 전승은 전반적으로 매우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아마테라스가 3위 여신을 무나타카로 보내면서 "해로 가운데에서 천손을 돕고, 천손의 제사를 받아라."라고 이야기했다는 부분은 야마토 조정이 무나카타 여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제사지내던 후대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되었으므로, 1번과 4번에 근거해서 무시한다. 


추가: 고사기의 해당 부분에서는 흥미로운 변형이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 내 모든 전승에서는 '남신이 나오면' 스사노오가 결백하다고 서약(우케이) 전에 미리 정하고, 그에 따라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고사기에서는 그런 거 없이 먼저 서로 물건을 바꾸어 씹어서 아이들을 낳은 뒤,  (스사노오의 칼을 아마테라스가 씹어서 나온) 세 신이 연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스사노오는 스스로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아마테라스는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박경미의 논문 '수약녀론'(일어일문학회 42권 2호)에 근거하여 고사기의 이러한 전승을 후대의 변형으로 보고 무시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따른다면, 가장 원형이 된 이야기는 아래와 같을 것이다. 


스사노오가 누이를 만나러 다카마노하라에 올라오자 아마테라스가 제위를 걱정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스사노오와 대치한다. 스사노오는 누이가 자기를 믿지 못함을 알고 서약(우케이)로 점을 쳐보자고 제안하면서, 만약 자기가 남신을 낳으면 결백하다고 전제한다. 이에 아마테라스가 자기가 지닌 구슬을 샘물에 씻어 씹어 뱉으니 여신 셋이 나왔다.  스사노오가 자기가 지닌 십악검을 조각내어 역시 샘물에 씻고 씹어서 뱉으니 남신 다섯이 나온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다른 속셈이 없음을 인정하고 다카마노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내 생각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실제 일본신화 연구자들이 접한다면 웃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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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사회단상  |  2014. 3. 24. 23:01




나는 예전에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에 속한 '오키노시마'라는 작은 섬에 관한 포스팅을 쓴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일본서기나 고사기를 읽지 못해서 단편적으로 흩어진 정보를 모아 글을 썼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둔  일본서기 pdf 파일을 받았다.  이미 일본서기 완역본이 없지는 않으나 이렇게 번역해둔 자료를 받으니 참으로 편안하다. 


무나카타 대사는 '교통안전의 신'으로 유명한 세 여신을 받드는 곳이다.  세 여신을 모신 중심 사당은 각각 오키노시마 섬, 오시마 섬,  그리고 뭍에 있는 무나타타 본사.  이렇게 세 곳에 있으며,  각 사당에서 한 신을 모신다.  (무나카타 본사에는 부속사당에서 다른 두 신도 함께 모시지만,  본전에서는 한 신만 모셨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화를 무나카타 3 여신 관련 사항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자나기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 이자나미를 만나려고 저승에 내려갔다가,  아내의 썩어가는 모습을 보고 놀라 기겁하여 도망친다.  이에 이자나미도 성이 나서 남편을 쫓아오지만, 이자나기는 따라잡히기 전에 저승을 나와 바위로 문을 틀어막는다. 그리고 부정이 탔다 하여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니 아마테라스, 쓰쿠요미, 스사노오가 태어난다.  이자나기는 세 신에게 자기네 몫으로 지배할 곳을 나누어주었지만, 스사노오는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엉엉 울며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만 말한다.  이러니 이자나기는 화가 나서 내쫓으면서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다.  스사노오는 그 전에 먼저 자기 누이 아마테라스가 보고 싶어서 천항계 다카마노하라로 올라오지만,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천상계의 지배권을 빼앗으려 하는 줄 알고 걱정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강가에서 스사노오를 맞았다.  이에 두 신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일본서기 6-0 (본문이다.)
스사노오가 누이에게 맹세[각주:1]를 하자고 주장한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가 차고 있던 십악검[각주:2]을 세 조각내었다. 그 뒤에 샘물(아마노마나위)에서 흔들어 씹어서 뱉었다. 그 입김의 안개에서 다고리히메(田心姬), 다기리히메(湍津姬),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  3 여신이 나왔다. 

아마테라스는 "십악검은 너의 것이니 그것을 근본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네 아이다."하면서 여신들을 스사노오에게 주었다. 이 여신들은 무나카타노키미들이 제사지내는 신이다. 

일본서기 6-1
아마테라스가 맹세를 하자고 주장한다. 아마테라스가 먼저 자기가 차고 있던 십악검을 깨물어 나온 아이가 오키쓰시마히메(瀛津嶋姬), 구악검을 깨물어 나온 아이가 다기리히메, 팔악검[각주:3]을 깨물어 나온 아이가 다고리히메다. 

아마테라스는 "너희 세 신은 해로의 도중으로 내려가 머물며 천손을 돕고, 천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라" 명령하였다. 

일본서기 6-2
스사노오가 하늘에 올라갈 때 '하카루타마'라는 신이 곡옥을 바쳤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의 저의를 의심하자 스사노오는 "누님을 뵙고자, 또한 곡옥을 바치고자 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테라스가 어떻게 증명하겠느냐고 묻자,  스사노오가 맹세하자고 하였다.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에게 자기가 찬 칼을 줄 테니 너는 곡옥을 달라고 하여 서로가 지닌 물건을 바꾸었다.  

아마테라스가 샘물 '아마노마나위'에 곡옥을 띄워, 구슬 끝을 물어 끊어 내뿜었더니 그 입김에서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市杵嶋姬命)가 나왔다. 오키쓰미야(沖宮)[각주:4]에서 있는 신이다.

구슬 중간을 물어 끊어 내뿜었더니 그 입김에서 다고리히메노미코토(田心姬命)가 나왔다. 나카쓰미야(中宮)[각주:5]에 있는 신이다. 

구슬의 꼬리를 물어 끊어서 내뿜었더니 입김에서 다기쓰히메노미코토(湍津姬命)이 생겼다. 헤쓰미야(海濱) [각주:6]에 있는 신이다. 

일본서기 6-3
아마테라스가 먼저 맹세해보라고 하면서,  만약 스사노오가 사심이 없어 남자를 낳으면 자기가 아들로 삼아 아마노하라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였다.[각주:7] 

아마테라스가 먼저 십악검을 물어서 오키쓰시마히메노미코토(瀛津嶋姬命)를 낳았다. 다른 이름은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市杵嶋姬命)다. 

구악검을 물어서 생겨난 아이가 다기쓰히메노미코토(湍津姬命)다. 

팔악검을 물어서 생겨난 아이가 다기리히메노미토코(田霧姬命)이다. 

세 여신을 우사노시마[각주:8]에 살게 했는데, 지금은 바다 북쪽 도중에 진좌돼 있다. 

오키노시마(沖ノ島)는 무나카타시 해안에서 약 60 km 떨어진, 면적이 97 헥타르쯤 되는 섬이다.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으로 이 섬의 흙 한 줌도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  이 섬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으나 10일 간격으로 뭍에 있는 무나카타 대사에서 파견하는 신관, 그리고 섬에 있는 항만 관리자 등등 사람이 있긴 있다.  악천후 등 비상사태 때 지나가던 선박이 이 섬으로 피난 올 수 있으나,  신성한 섬이라 하여 섬에 발을 밟기 전에 부정 씻기를 해야 하며,  출항할 수 있게 되는 대로 떠나야 한다. 
오미야(大)는 해안에서 약 8 km 떨어진 섬인데 약 900 명 정도 주민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라면 일본서기에서 각 신을 모신다고 설명한 내용과 현대의 무나카타 대사에서 실행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이다.  현대의 무나카타 대사가 어찌하는지는 무나카타 대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해당 부분에는 본문과 일서 셋이 있다.  이중 두 번째 일서에서만 각 신과 사당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각 사당과 제신의 이름은 이러하다. 

오키노시마         오키쓰미야(沖宮)에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
오시마                 나카쓰미야(中宮)에 다고리히메(田心姬)
무나가타 본사    헤쓰미야(海濱)에   다기쓰히메(湍津姬)

(위치상으로 오키노시마가 가장 북쪽, 오시마가 그 다음, 무나카타 본사가 가장 남쪽이다.) 

하지만 현대의 무나카타 대사에서는 이렇게 한다. 

오키노시마      오키쓰미야(沖津宮)에 다고리히메(田心姬)
오시마              나카쓰미야(中津宮)에 다기쓰히메(湍津姬)
무나카타 본사 헤쓰미야(辺津宮)에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

뭐라고 해야 할까.  각 장소에서 모시는 신을 "한 칸씩 위로 올렸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북쪽, 오키노시마에 있던 이치키시마히메를 가장 남쪽인 무나카타 본사로 남하(?)시켰다.  신명의 순서는 일본서기 본문과 똑같다.  사당 이름도 발음은 같으나 표기가 다르다.  오시마와 무나카타 본사의 사당명은 고사기와 같으나 오키노시마만은 고사기의 奥津宮와 다르다.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일본서기는 무나카타 세 여신에 대한 주석이 이 부분에서 틀렸다.  일본서기 1권 291번 주석에서 무타카타 본사의 제신이 '현재에도 다기쓰히메'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이치키시마히메다.   

그런데 적어도 기록으로만 보면 이치키시마히메가 오키노시마에 있었던 듯하다.  첫 번째, 세 번째 일서에서 맨 처음 태어난 여신이 오키쓰시마히메(瀛津嶋姬)라고 하는데,  세 번째 일서에서 부언하기를, 오키쓰시마히메의 다른 이름이 이치키시마히메라고 한다.  이름 중 오키쓰시마(瀛津嶋)라는 부분이 오키쓰미야(沖津宮)라는 사당명과 겹친다. 또한 가장 먼저 태어난 여신이 위치한 곳이 오키노시마라고 하는 점에서, 당시에도 오키노시마를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 

일본서기 본문과 일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전승인데,  본문은 가장 마지막은 아닐지라도 대체로 늦은 편에 속하는 전승이며, 또한 당시 야마토 조정의 공식 입장이다.  호족 무나카타 집안이 처음에는 오키노시마에 '이치키시마히메'가 있다고 믿었다가, 나중에 야마토 조정에게 복속되고 어쩌고 하는 와중에 신을 모신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1. 신탁, 혹은 점의 일종이다. [본문으로]
  2. 길이가 10악, 즉 약 1 m 정도인 검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구악검, 팔악검은 각각 길이가 약 90, 80 cm쯤 되는 검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4. 고사기에는 胸形之奥津宮라고 기록돼 있다. [본문으로]
  5. 고사기엔 胸形之中津宮라고 기록돼 있다. [본문으로]
  6. 고사기에는 胸形之辺津宮라고 기록돼 있다. [본문으로]
  7. 오직 이 부분에만 있는 특이한 내용이다. 또한 이 기록에서 스사노오가 낳은 남신들은 다른 부분과 달리 5위가 아니라 6위다. [본문으로]
  8. 宇佐嶋. 주석에 따르면 아무래도 오키노시마를 잘못 쓴 듯하다. [본문으로]
      역사/사회단상  |  2014. 3. 23. 01:06




자신들의 노골적인 정치적 의견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미사라는 성사를 통해' 표명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걸 왜 미사를 통해 표명하냔 말이다. 


가톨릭에 그레고리오 미사라는 관습이 있다. 전설 같은 것인데, (연옥에 들어간) 특정 사람의 영혼을 위해 30일간 연속으로 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되고 또한 영향력 있는 관습이지만 가톨릭에서 비추천된다. 미사는 특정 한 사람을 위해 전세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공동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30일간 특정 누군가를 위한 위령미사를 드림은 미사의 공동체성을 깨트린다는 이유다. 


시국 미사도 이와 같다. 그와 같은 노골적인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장으로 미사를 사용한다면 이는 미사란 성사, 종교의례의 본래의 의미가 깨지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이 그러했듯이 교회가 사회에 있어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해야 한다면 시국 미사는 충분히 공동체적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당시 엘살바도르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정의의 길>은 매우 선명했지만 또한 피로 물들었다. 무엇이 옳은지 크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느냐 잡지 않느냐 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을 뿐.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는 다르다. 더이상 우리 사회는 군사독재 치하도 아니고, 무엇이 가장 올바르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정책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데에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한, 복잡하고 고도화된 사회지. 시국 미사 같은 것이 허용될 수 있던 시기는 실상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때에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그토록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중히 여긴다면서 어떻게 북한 주체사상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지? 주체사상이 <사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긴 한 물건이던가? 그리고 NLL 훈련이 정말로 잘못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그렇다고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지? 


하느님과 신앙이 연평도에서 죽은 주민들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고 하던가?

      역사/사회단상  |  2013. 11. 23. 22:48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일본군은 사실 매우 뛰어난 군대였다. 1933년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나라 군대와는 달리 일본군 병사 개개인부터가 군인이라는 사실에 지극히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군인정신을 실천하려 애썼다. 일상생활에서도 군인정신을 실천하는 그 기개와 고결함!  필히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니리.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사건 때부터 일본군이 얼마나 연전연승,  상승(常勝)군대가 될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오사카 고스톱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은 민관군이 서로 협력하니 마치 왕망이 신을 다스림과 같았다. 


일본군은 실로 엄부자모와 같은 군대였다. 지휘관은 엄부요 부사관은 자모이니, 지휘관의 명령이 곧 천황의 명령인 줄로 알고 받들었다. 그 기강이 추상과 같아 매번 감사를 하여도 서류와 다른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고, 부분적으로 패전을 한다 하여도 단 한 명도 포로가 없었다.  설령 포로로 잡힌다 하더라도 기꺼이 할복하니 어찌 미군이 살아남은 포로의 입에서 기밀정보를 접할 수 있으랴?   병사들은 매번 메이지 천황이 내린 군인칙어를 낭송했는데 과연 칙어에서 가르친 군인상과 같았다. 또한 육해군 협력이 잘 되어 서로 공을 다투지 않고 매번 서로를 추어올리니,  상앙이 진을 돌볼 때에도 이처럼 기강이 서릿발 같지 않았고,  주문왕이 주를 다스릴 때에도 서로를 아낌이 이렇지 않았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모두가 용맹하여 감히 '후퇴'라든가 '패배'라든가 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오직 '진격'  '돌격'  '승리'란 말을 입에 담았을 뿐이다.  미국 군인들은 일본인보다 기골이 장대하다 하나 정신력이 약하여 매번 후퇴니 작전이니 하는 말을 해대니,  일본군에 맞서 총칼에 찢긴 어육이 되었을 뿐이다.   일본군 병사들과 지휘관이 혼연일체가 되니 위나라 오기를 위하여 병사들이 몸을 바쳤다 한들 이와 같으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력적으로 우월한 미군을 상대로 얼마나 통쾌한 일격을 양인들의 오만한 콧대에 날렸던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은 지략이 깊고 용맹하여 조괄이 진과 맞섬과 같았다.  그 이름은 일본사에 길이 빛나 천추에 남았으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다. 조괄은 단 한 번 실패로 안타깝게 전사하였으나,  무타구치 장군은 오래도록 일본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웠으니 기실은 조괄보다 낫다 하겠다.  특히 임팔 작전은 무타구치 장군의 자랑이라 할 만한 업적으로,  비록 적장이라 하나 두고 두고 칭송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일본의 명재상,  도조 히데키 총리를 추억해야 마땅할 것이다.  도조 총리는 험난한 때에 군주에게 충성함은 범려라 하여도 이와 같지 않으며, 형국을 조망하여 국운을 개척하는 데에는 제갈량이 온다 하여도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 가사도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 조국이 위태할 때 군권까지 장악하여 좀스러운 자들이 감히 국사에 관여치 못하게 하였고,  시의적절한 때에 진주만을 공격하니,  아둔한 미국인들마저 일본이란 이름을 들으면 오금을 저렸다. 대본영을 이끌어 전쟁을 지휘함에 있어 지혜와 통찰력이 심원하니 손무가 살아온다 해도 이같지 않을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이러한 저력이 빛을 발하니 일본 해군은 전설이 될 만한 공격력과 전술로 용맹하게 달려들어 미 해군을 궤멸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해저로 가라앉았던 항공모함을 인양해서 진격하는' 듯이 진격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도조 총리는 전진훈에서 군인들이 패배하더라도 결코 포로가 되지 말고 할복하기를 명하였다.  일본이 핵을 두 번이나 맞은 뒤 시세가 기울어 항복할 때에도 도조 총리는 정치인이자 또한 군인으로서 용맹스러이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도조 총리와 같은 사람이 자살에 실패하여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함은 언어도단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뛰어난 군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배한 것은 오직 미국이 자금력과 기술력으로 핵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독일측 과학자들이 돕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허나 적어도 재래전력으로서 일본은 정신력이야말로 야마토 남아의 힘임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대한의 군대도 비록 원수라 하나 이러한 일본군의 전례를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 본 포스팅은 중국사와 일본 근대사를 알아야 웃을 수 있도록 최적화되었습니다. 
* 왕망, 조괄, 가사도:  전부 자기 나라를 망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중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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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사회단상  |  2013. 8. 16. 00:43




Mi pensas ke drako-regxo de Han-gang rivero estas la plej ricxa el cxiuj tradiciaj dioj.  Aliaj ne povas akcepti iun de homoj pro tio ke Kristianoj aux ateistoj estas pli multigxinta ol ili estis. Sed  la drako-regxo estas malsama kun ili. Almenaux kvin homoj sakraficias sin po unu tago al li, speciale sur Mapo-granda-ponto, cxu ne? Neniu povas paroli  "li ne estas beata". 

      역사/사회단상  |  2013. 8. 3. 01:11




2007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혔다.  나는 한국 개신교계의 순교 담론 자체가 이상하고,  선교 담론은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보면 관람객들이 지나가는 통로 거울 밑에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일부러 순교자가 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문뜩 아래 글이 생각났다. 


"최근에 프리기아 지방에서 온 프리기아 출신의 퀸투스라는 사람이 맹수들을 보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자발적으로 순교하도록 부추긴 사람이었습니다. 전집정관은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기원제물을 바치도록 온갖 회유의 말로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스스로 (순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이와 같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부문헌총서 12,  "폴리카르푸스의 편지와 순교록" 중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번역을 인용. 원문은 서기 160년경쯤에 씐 것으로 추정됨.) 


선교를 하다 보면 순교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순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수가 좋은 학문활동을 함이 목적이어야지, SCI급 논문지에 실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듯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활동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아니,  "어둠만" 보여준 사례라고 정정하자. 


아프가니스탄 사건 관련으로 무슨 말이 있었나 글을 찾아보았다. 


홍기영, "2007년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와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 <<선교신학>> 19 (2008년): 159-188.


글쓴이는 나사렛 대학교 선교학 교수라 하였다.  상기 글에 대한 내 평가는 이거다. 


조선중앙통신 or 대본영 발표


실패도 아주 대실패한 사례를 소재로 하면서도 털끝만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어두운 부분을 철저하게 검열하여 썼다.  그래서 내가 조선중앙통신이거나 대본영 발표라고 하는 거다.  



"2007년 7월 19일은 한국교회가 잊지 못할 날이다. 분당에 소재한 샘물교회에서 파송한 단기선교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피랍된 날이다. 이날 우리 한국교회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당황하였으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국민들은 제발 무사히 모든 피랍된 선교단원들이 풀려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하였다."


"특히 타문화권 선교(cross-cultural missions)는 고되고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도 선교적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게을리 한다면, 하나님은 이 축복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수도 있다(계 2:5).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선교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1980년대 말 이래 경험하고 있는 침체 또는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하고 더욱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결코 하나님의 선교를 막을 수 없으며 앞으로 어떤 유사한 사태도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편협하고 독선적인 자세로 선교하는 것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선교형태를 또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샘물교회는 평화봉사단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다.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민족의 평화와 복지와 건강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간 것이다."


"샘물교회 담임목사는 “여러분이 볼모로 잡고 있는 그들은 여러분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저를 볼모로 잡을지언정 그들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한국교회도 그와 함께 기도해야 했다. 우리는 샘물교회를 위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샘물교회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했다. 오히려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곳에 그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 것이 아닌가?"


"샘물교회에서 파송한 선교단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선교형태가 아니라 현지인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부터 시작하는 청취자 중심(audience-oriented)의 의료복지선교를 수행했다."


글쓴이가 철저히 검열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를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음이 은연 중에 드러나는 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샘물교회를 위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샘물교회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했다."



글쓴이가 말하는 '우리'란 개신교계다.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지"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전재한다.  이 글은 제목은 분석인 것처럼 썼으나 실상 분석이 아니다. 글쓴이에 따르면 샘물교회 선교단은 단 한 치의 잘못도 없었다.  아니,  실상 선교단마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만약 이 글을 본다면,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개신교에 대한 원성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차라리 연설문에 가깝다.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쳐 나가야 한다. 이런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다. 


글쓴이는 3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그리스도인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래서 나는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을 인용한 것이다. 



최우영,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 반개신교 담론의 기원과 해석", <<사회와 이론>> 14 (2009년): 313-351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최우영 교수가 쓴 위 논문은 조선중앙통신 같은 홍교수의 글과는 달리, 대놓고 그 어둠을 파헤치려고 한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2007년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표출된 반개신교 담론이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 종교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반개신교 담론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집합적인 양상으로, 그것도 매우 흥분된 형태로 분출되었다. 과거 정치권력에 의해 특정 종교가 비호나 박해를 받음으로써 여기에 대한 시시비비가 논의된 적은 있었지만(강인철, 2003; 박희승, 1995),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특정종교를 둘러싸고 긴장과 갈등이 이 정도로 불거져 나왔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표출된 반응은 개신교에 대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성토가 주를 이루었다." 


그래.  이 글이 오히려 상황을 직시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1년 전에 전초전이라 할 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2006년 3월, 인터콥 대표 최바울 목사가 8월 초에 아프가니스탄에 2천 명을 보내 평화축제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외교부도 바보가 아닌지라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2천 명을 보내겠다는 이 대담무쌍한 계획에 대경실색했다. 심지어 한기총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올 정도였지만,  최바울 목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1주일 예정이던 것을 3일 일정으로 줄이고,  7월 30일에 시작하려던 것을 8월 5일로 늦추었을 뿐이다.  아프간 정부도 "한국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통보했고,  이맘 500여 명이 모여 "한국인들이 선교하러 왔다" 하며 항의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만약 일정대로 진행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에 최바울 목사는 이 모든 소식에 대해 "사실무근이다.  한국 정부가 아프간 정부를 압박해서 있지도 않은 소식을 뿌린다" 하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국 이미 입국했던 사람들이 추방되고 나서도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약간 이야기는 다른데,  2005년 통계청의 종교인구통계가 발표됐을 때에도 개신교계에서 작은 파란이 있었다. 개신교인 인구가 천만이 못될 뿐만 아니라,  그 전과 비교해서 오히려 숫자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때 몇몇 사람들은 "통계청이 자료를 조작한 줄 알았는데, 따로 알아보니 맞는 것 같더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통계청이 개신교인 인구수를 조작해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외교부가 (아무 문제 없는) 아프간 선교를 방해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최바울 목사가 이끄는 인터콥은 심지어 다른 개신교 선교단체와도 갈등이 많아서 결국 다른 단체들이 협력관계를 끊을 정도긴 했지만, 당시에 최바울 목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많았음은, 그리고 아마 지금도 꽤나 있음은 확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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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진 지음, <미스터 크롤리: 대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롤리 평전>, 2003, 모자이크


맨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외국 책을 번역한 줄 알았다. 그런데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오컬티스트가 지은 책이었다.  책 앞날개에 씐 저자 약력에서는 1999년에 동방성당기사단(O.T.O)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름 적재적소의 인물이 크롤리 전기를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런데 책을 다 읽어보고 난 이후의 내 느낌은 


"내가 두 번 다시 오컬티스트가 쓴 책을 읽나 봐라."


................................................


이거, 전기물로서는 빵점이다.  알레이스터 크롤리란 인간의 행적보다는 오컬트 해설에만 노골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알레이스터가 유명한 오컬티스트인 만큼,  그이의 전기를 쓴다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오컬트에 대한 해설, 소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컬트적인 부분은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지만, 막상 행적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하고 간지가 나는 부분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알레이스터는 1934년에 영국에서 명예훼손으로 다른 사람을 고소하여 재판을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증인으로 올라온 사람 중에는 '베티 메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알레이스터의 마법 제자인 '라울 러브데이'의 아내였다. 베티 메이는 알레이스터가 기묘한 카리스마와 수행으로 남편이 죽게 했으며, 동물희생을 바치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물론 알레이스터는 그런 적 없으며 베티가 정신이상자라고,  자기는 오히려 인내와 사랑으로 보살폈다고 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직접 베티와 알레이스터가 각기 자서전에 쓴 바를 몇 장씩 인용하면서 길게 설명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역시 알레이스터 편을 들어 설명한다.  베티는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 부분을 넘기면 저자는 알레이스터 행적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알레이스터가 패소해서 돈을 물어야 했으며,  몇 년 뒤에는 파산신청까지 했다고 말이다. 


"결국 이렇게 전 재산을 날려버린 노년의 크롤리는 마법조직 동방성당기사단이 보내주는 연금만으로 생활하며 이 하숙집 저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194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


평색이 크롤리 일생만 다룬 평전이면서 재판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심지어 위키페디아보다도 설명이 부실하다.  아니, 아예 없다.  


게다가 종종 저자는 독자를 가르치려고 든다.  아무리 평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기인데,  저자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가 복음서를 편집했고,  관련 증거를 없앴다는 주장에 이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알레이스터가 재판을 건 것에 대해서도 저자 스스로 인정하기를,  다른 전기 작가들은 대부분 알레이스터가 당시에 자금이 쪼달렸기 때문에 재판을 통해서 돈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마저도 오컬트적으로 주장한다.  알레이스터는 재판에서 질 줄 알았지만,  나자렛 예수가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 했듯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크롤리도 무고하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나자렛 예수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므로,  왜 현실시대의 인물인 크롤리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조작된' 신화적 인물인 예수를 따라야 했다고 주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겠지.  


아마 다른 작가라면 간단히만 설명하고 넘어갈 만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도 오컬트적인 부분을 소개하려고 길게 소개한다.  알레이스터과 황금새벽단에 있던 시절에 '문 차일드'라는 소설을 썼다는데,  이 소설에서 묘사된 마법 전투 이야기를 8쪽에 걸쳐 인용한다.  알레이스터가 자기 전생이라며 주장하는 내용도 10쪽 가까이 설명한다.  


알레이스터와 (아일렌드의 유명한 문인인)  예이츠가 똑같이 황금새벽단에 있었는데,  알레이스터는 예이츠가 악마적인 마법을 행하며,  예이츠가 자기의 시적 재능을 무섭게 질투했다고 주장한다.  앞서 이야기한 소설 문 차일드에서도 예이츠의 이름을 바꾼 사악한 마법사 '게이츠'가 선한 마법사들을 공격하다가 죽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고.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예이츠가 정말로 그랬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잘해 봐야 예이츠가 알레이스터의 시적 재능을 질투했다는 부분에서 '알레이스터의 말이 사실이라면'이라고 부언하는 정도다. 


알레이스터는 자기 전생 중 하나가 저 유명한 막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알렉산데르 6세를 단순한 변태 교황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한다.  글세?  가톨릭 신자조차 옹호하길 포기한 교황사상 최악의 교황이?  만약 알레이스터가 저렇게 주장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역시 알렉산데르 6세를 기꺼이 '변태 교황'으로 보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 아는 지인이 말했다. 


"오컬티스트들은 종종 자기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아요."


나도 동의한다.


이 책을 보고 너무 답답해서 제대로 된 전기가 없을까 싶어서 아마존을 뒤져봤다. 전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대부분 오컬티스트들이 썼고,  오컬티스트가 아닌 사람이 쓴 전기는 (내가 본 바로는) 한 권밖에 없다. 물론 아마존 내에서는 별로 평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평을 남긴 사람들도 '중립적으로 쓰려고 한 게 보인다'라고 평가하니,  언젠가 사볼까 한다.  언젠가. 


덧붙임:  이 책을 보고 구글링해보는 중에  알레이스터가 사망한 마을 사람이라며 올린 글을 읽었는데,  자기 마을에서는 알레이스터가 죽으면서 마을을 저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랬다.  워낙 인물이 인물이다 보니 그런 전설이 생길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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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협 동수도,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협이라고 부르는 곳에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카타(宗像)시에 속한다. 일본어로 오키(沖)란 말에 '먼 바다'란 뜻이 있다고 하니 오키노시마(沖ノ島)란 이름은 '바다 멀리 있는 섬'이란 뜻일 것이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에 따르면 면적이 약 0.97 제곱 킬로미터(약 29만 3천 평)이라고 하니 올림픽 공원의 3분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위치는 북위 34도 14분 39초, 동경 130도 6분 20초.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243.6 미터라고 한다. 


오키노시마는 면적은 좁지만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부산-쓰시마 섬 북쪽 곶-오키노시마가 거의 직선으로 이어진다. 부산에서 오키노시마까지 약 145 킬로미터, 오키노시마에서 무나카타시까지 약 60 킬로미터 정도 된다. 


오키노시마 자체가 다고리히메(田心姬) 여신의 신체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섬에는 여자는 무조건 상륙할 수가 없다. 섬 남서쪽 해안 가까이에 오키쓰 궁(沖津宮)이라는 신사가 있는데, 뭍에 있는 무나카타 대사에서 남자 신관 한 명을 파견하여 10일 간격으로 교대케 한다고 한다. 말은 궁이라고 하지만 신격이 높아 '궁'이라고 했을 뿐 규모가 크지는 않다. 남자 신관 단 한 명만 있는데 신사 규모가 크면 관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관은 매일 아침, 바닷물에서 목욕재계한 다음 길을 따라 산에 올라가 오키쓰 궁에서 정해진 대로 예식을 올린다. (겨울에는 목욕재계를 어떻게 할까?) 


일본 기기신화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쳐울다가 아버지 이자나기에게 쫓겨나자(____) 천계 다카마노하라에 올라가 누나인 아마테라스 여신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테라스는 자기 동생 스사노오가 자길 쫓아내고 천계의 군주가 되려는 줄 알고 급히 무장하고 마중(?)나갔다. 강변에서 서로 만났는데, 스사노오는 누나가 자기를 경계함을 깨닫고는 점을 쳐보자고 제의한다. 서로의 물건으로 신을 탄생케 하자. 만약 내가 결백하다면 내 물건에서는 여신이 나올 것이다. 


먼저 스사노오가 자기 검을 아마테라스에게 건냈다. 아마테라스가 검을 입에 넣고 씹어서 뱉자 여신 셋이 나왔다. 아마테라스가 곡옥을 건네자 스사노오가 이를 받아 씹어서 뱉었다. 그러자 남신 다섯이 나왔다. 스사노오가 처음 말했던 대로 스사노오의 검에서 여신 셋이 나왔으므로,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결백함을 인정하고 타카마노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여기서도 깽판을 치다가 결국 하계로 내쫓겼다. 


일본서기에서는 아마테라스가 숨결을 불어넣자 나왔다는 세 여신이 차례대로 다고리히메(田心姬), 다기쓰히메(湍津姫), 이치키시마히메(市杵嶋姬)라고 한다. 고사기에서는 차례대로 다키리비메(多紀理毘売), 이치키시마히메(市寸島比売), 다기쓰히메(多岐都比売)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이 세 여신에게 천손을 돕고, 또한 천손에게 제사를 받으라 명했기로, 세 여신이 무나카타에 내려왔다고 한다. 오키노시마, 오노시마, 그리고 본토(?) 무나카타시에서 각각 이 세 여신을 모신다.


오키노시마는 쓰시마 섬을 제외한다면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섬 교통의 요지다. 다고리히메의 신체로 여긴다면서도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곳이므로 17세기에 (지금의 후쿠오카를 다스렸던) 구로다 번(黒田藩)에서 여기에 병력을 일부 주둔시켰고,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이 기지를 세웠다고 한다. 1905년 5월 27일에 쓰시마 해전이 이 근처에서 벌어졌는데, 당시에 오키쓰 궁에 있던 신관 佐藤市五郎(사토 이치고로?)가 이 해전을 생생히 목격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무나카타 대사에서는 매년 5월 27일을 다고리히메 여신의 축제일로 정했다. 다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하사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유인 듯하다.(확인해보지는 않았다.) 5월 27일이면 선발된 남자 200명 남짓 정도 오키노시마로 입도하여 축제를 거행한다. 그런데 오키노시마가 신체이므로 그냥 들어가지는 못하고 며칠 전부터 신사 참배부터 한 뒤에 오키노시마 앞 바다에서 목욕재계하여 부정을 없앤 뒤에야 비로소 오키노시마 땅을 밟을 수 있다. 오키노시마가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관계로 흙 한줌조차 들고 나올 수 없다. 


오키노시마 근처에는 다른 섬이 없다. 그래서 오키노시마 남서쪽 해안에 작은 항만시설이 마련돼 있다. 지나가던 선박이 날씨 문제로 항해를 계속하기 어려울 때 이곳으로 피난하란 것이다. 하지만 섬 쪽에 통보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고, 목욕재계를 한 뒤에야 섬에 들어올 수가 있다. 한국인 선박을 위한 경고판도 여기에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 줄씩 교대로 쓰여 있는데, 한국어 부분만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한국 어선원 여러분 에게. 

 1. 한국 어선원의 상륙을 금지한다. 

   무단 상륙한 경우 에는 처벌한다. 

 2. 물, 식량, 기타물품을 가지고 나가는것을 금지한다. 

 3. 날씨가 회복 되면 즉시 출항 할것. 

 후꾸오까 해상보안부. 


어디 한국인에게 교정 좀 받지. 


오키노시마에 대한 글을 보면 흔히 오키쓰 궁에 있는 신관 한 명만 있는 듯 착각하기 쉽지만, 항만시설에는 신관 아닌 사람, 어부 등도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항만시설 바깥에는 신관 한 명 말고는 다른 사람이 전혀 없지만. 


195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유물이 나왔다. 스물 세 곳에서 4~10세기 무렵의 왕릉급 유물이 8만 점이나 쏟아져나온 것이다. 이중 6만 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무나카타 대사에서 보관 중이다. 대사 측은 '신보관'이라는 건물을 따로 세워 거기에서 대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쓰시마 섬에서 발굴된 비슷한 시기의 유물 전체를 합쳐도 오키노시마에서 발굴된 양에 감히 비하지 못한다고 하여,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오키쓰 궁은 오키노시마 남서쪽 해안 가까운 산 골짜기에 있다. 이 골짜기를 따라 20 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는데, 이 골짜기에서, 특히 거암(巨巖) 근처에서 유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위치를 보면 오키쓰 궁을 지은 위치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일부러 이 바위들이 있는 골짜기 끄트머리를 터로 잡았을 것이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부산 - 쓰시마 섬 - 이키 섬(壱岐島) - 일본 규슈

부산 - 쓰시마 섬 - 오키노시마 - 무나카타 - 세토 내해 - 일본 긴키

비록 지금은 오키노시마가 다고리히메의 신체라 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아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제사 유적이 10세기 것까지 있다고 하니, 아마 10세기 쯤부터 오키노시마를 신의 섬이라 하며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어부들이 어로생활을 하던 흔적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오키쓰 궁이 있는 골짜기의 거암 근처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은 시기별로 4단계로 구분한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암상(岩上)제사. 

거암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암상제사라 부른다. 큼직큼직한 바위에 신이 깃든다 하며 바위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 바위 윗부분 가운데에 큰 돌을 놓고, 주변을 작은 돌로 네모나게 둘렀다. 가운데 있는 돌이 제단이며, 작은 돌들이 경계선일 것이다. 주변에 비쭈기나무를 세우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있다. 중국에서 만든 금속 거울, 옥 장신구, 무기 등이 출토되었다. 일본 긴나이 지방에 있는 큰 고분에서도 비슷한 금속 거울이 나왔기 때문에, 일본 야마토 조정이나, 최소한 지방 호족이 제사를 거행한 것으로 추정한다. 호족이 지냈다면 아마도 무나카타 씨가 했을 것이다. 또한 신라나 가야에서 만든 덩이쇠도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을 묻음은 신에게 예물을 바치려는 것이다. 


5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암음(岩蔭)제사 

사람들 인식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이 직접 바위에 깃들지 않고 그 아래에 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곳도 바위 위가 아니라 바위 아래가 되었다.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바위 아래 그늘진 곳, 혹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에 제사를 지내고 유물을 묻었다. 특히 이 시기 유물에는 신라 왕릉에도 부장된 금반지, 유리제품, 금동 마구가 출토됐다.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고급품들이었다. 물론 일본 고분에서 나오는 일본식 부장품도 함께 나왔다. 페르시아 근처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유리 그릇도 발굴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 반암음 반노천제사 

암음에서 하기도 하고 노천에서 하기도 한다고 '반암음 반노천'이다. 일본산 유물은 금속품과 토기가 나왔고, 외국산은 중국 당삼채, 금동 용두가 나왔다.  


8세기부터 10세기 초반까지 노천제사 

골짜기 내 편평한 땅에 네모나게 돌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유물로는 돌 제품과 토기가 나왔다. 


앞에서 다고리히메 등 세 여신에 대한 신화를 언급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이 세 여신은 무나카타 지방의 토착신이며 나중에 야마토 조정에 포섭되었다. 5세기 전반에 호족 무나카타 씨가 한반도 남부와 일본간 철 교역에 관여하면서 힘이 부쩍 강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와 왜국은 5-6세기에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왜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신라의 최고급 유물이 오키노시마에 묻힐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계 유물이 '전리품'일 거라고 점치는 모양이다. 왜가 신라를 공격해서 고급품을 들고 일본에 왔고, 신에게 예물로 이를 바쳤으리란 것이다.


동아대 박광춘 교수는 여기에 대해 좀 다른 주장을 한다. 6세기부터 삼국사기에서 왜 관 사라지고, 신라는 가야를 병합한다. 이에 야마토 조정은 가야를 도우려 병력을 보내려고 했지만, 이는 규슈 지방 호족들에게 부담이 되어 반란을 시도했다. 그리고 무나카타 씨도 여기에 합류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라는 규슈 지방 호족들이 가야를 돕지 못하도록 선물을 보내며 동맹을 시도했을 것이고, 오키노시마에서 양측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동맹을 맺었으리란 것이다. 6세기부터 신라나 한반도 쪽 유물이 사라지고 외국산으로는 중국 것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제사라고 보기엔 예물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10세기까지 오키노시마에서 지낸 제사가 역시 '다고리히메'에게 바친 것인지는 내가 읽은 자료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박광춘 교수는 '용왕'이라고 말하는데, 박 교수와 관심사항은 '한반도산 유물'이지 제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넘긴 것 같다. 나는 용왕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용왕이라면 바다의 신이라는 이야기인데, 바다의 신이라면 바닷가 근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오키노시마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전진기지 노릇도 했다고 하니, 이 섬에 있는 신이 인근 바다도 함께 다스린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신을 무나카타 씨가 자기네 신으로 포섭(?)했을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무나카타 씨가 이 섬의 신을 자기네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기네 신이라며 연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반대로 자기네가 원래 받들던 신들 있었는데, 이 섬에 있는 신이 바로 자기네 신들 중 한 분과 같은 분이라며 동일화를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더러 한 쪽을 고르라면 후자에 걸고 싶다. 물론 나는 일본어 자료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므로 근거조차 제대로 댈 수 없다. 하지만 논문 쓸 것도 아니고 내가 학자도 아니니, 그냥 적당히 넘어간다. (_____)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27




태평광기에서 인용한 이야기 중에 무척 재미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반언이란 사람이 쌍륙이란 놀이를 무척 좋아해서 어디 나갈 때면 늘 몸에 쌍륙판과 주사위 두 개를 챙겨갔다고 한다. 한번은 반언이 예의 쌍륙판과 주사위를 지닌 채 배를 탔는데 큰물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반언은 물에 빠져 가까스로 판자 하나를 잡았는데, 오른손으로 판자를 잡고 왼손으로 쌍륙판을 들고, 입으로는 주사위를 머금고 꼬박 하루 밤낮 파도에 떠밀려다녔다. 가까스로 뭍으로 흘러들어왔을 무렵 살이 상해서 손에 뼈가 보일 지경이었지만, 쌍륙판을 놓지 않았고 주사위도 뱉지 않은 채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쌍륙을 좋아하기가 괴벽이라 할 만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내내 유쾌했다. 좋게 말해야 괴짜일 터이나 난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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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09




대한제국 말 조선을 생각하다가 문뜩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다. "만약 합병되어서 정말로 피합병국 백성들이 질적으로 훨씬 나아진다면, 그러한 경우에도 독립을 주장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도 답하지 못했다. 뭔가 이건 아니란 느낌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답하겠다.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피합병국 사람들이 원한다면 가능하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국가는 중요한 가치덕목이지만 최상의 가치덕목은 아니다. 하느님을 제외한다면, 나에게 있어 최상의 가치덕목은 사람이다. 만약 국가가 사람을 억압한다면 국가를 부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가정이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단 점이다. 피합병국이 합병주도국과 완전히 동등하고 평등하게 일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특히나 천수백 년 전의 역사를 들먹여 민족을 구분하려고까지 하는 무지막지한 경우가 횡행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낮다. 국가 역시 완전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은데 (국가 없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소수민족을 보라) 기존의 어떤 국가를, 개혁이 아니라, 컴퓨터 포멧하듯이 리셋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경우가 세상에 얼마나 나오겠나? 물론 지금껏 여러 나라가 명멸했지만 그중 나라가 정말 너무 개판이라 기본부터 리셋한 경우는 얼마 없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규정이 참 힘들다. 난 그냥 사람이라고만 했지만 계급이란 하위개념을 두면 이야기가 골치 아파진다. 그래서 난 이쪽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역사/사회단상  |  2013. 6. 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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